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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열사 서거 50주년 기념 토론: 현 정세와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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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날짜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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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열사 서거 50주년 기념 토론: 현 정세와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



김승호(상임고문)

2025년 4월 11일






1. 들어가며


  발제자는 2019년 11월 어느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상대로 ‘격변하는 세계와 인류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다. 그 때 이후 세계는 그야말로 격변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류가 홍역을 치렀으며, 세계경제에 장기불황이 계속되는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제3차 세계대전이 임박해 왔다. 다른 한편 선진자본주의 권역에서 정치의 극우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마침내 미국에서 극우성향의 트럼프 정권이 집권했다. 트럼프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관세를 무기로 하는 공격적 보호무역주의로써 자유무역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고, 군사·정치적으로는 그린란드를 탈취하고 캐나다를 합병하려 하는 등 영토존중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이게 바로 다극화된 세계질서의 한 모습이다. 다극화는 이루어야 할 질서가 아니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질서다. 다만 어떤 성격의 다극화냐가 문제인데, 트럼프는 정글적인 다극화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렇게 격변하는 상황에서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그릇되거나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여 정세를 착오하면 그런 실천은 십중팔구 실패로 귀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발제자는 지난 여러 해 동안 ‘격변기’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왔다. 오늘도 그런 상황인식을 가지고 발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에서 그런 착오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4.9열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열사들과 함께 투쟁했던 선배 동지들의 발자취를 떠올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정세를 바르게 읽고 이론과 전략을 잘 세우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그것이 아니더라도 나의 평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만인을 위해서 사는 마음가짐, 자세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주관적 요소의 변화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발제자가 몸담고 있는 교육기관의 어느 정치경제학 교수가 졸업식에서 한 말이다. 그런 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심포지엄이나 발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즘 세태를 보거나 정치를 보거나 사회운동을 보거나 드는 생각이다. 이런 비관적 생각을 하면서도 민중을 믿고 민중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믿는 낙관적 마음으로 오늘 발제를 하고자 한다.  


2. 현 정세 인식과 전망(1): 세계적 수준


1) 정세인식


<1> 포괄적으로: 미제의 쇠퇴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쇠퇴


  여기에서 포괄적이라 함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전체 즉 세계를 포괄해서 고찰함을 뜻한다. 또한 이렇게 전 세계를 포괄해서 살펴볼 뿐 아니라 그것을 역사적 변화의 시간 속에서 살펴봄을 뜻한다. 우리가 이렇게 현실을 포괄적으로 인식하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회운동은 현실을 살펴봄에 있어서 우리나라 현실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그 다음에 세계 현실을 살펴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소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우리나라 사회가 왜 이런저런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 이유나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다. IMF 외환위기 당시에 우리는 얼마나 세계에 대해 무지했는가? 그래서 속절없이 IMF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런 혹독한 시련을 겪었음에도 아직도 우리 사회변혁운동에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일국주의 경향이 많다. 이 또한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세계는 물질로 통일되어 있다”는 유물론의 명제가 있었듯이 오늘날의 세계는 한 마디로 자본주의로 통일되어 있다. 1990년대 초 소련·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그렇게 되었다. 물론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이 몇몇 사회주의 체제를 견지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그리고 정치권력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이 지배하고 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로 영위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나라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속에서 자본주의적으로 관계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냉전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계를 자본주의 세계로 인식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20세기 초 이래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제국주의 단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현대 제국주의는 영토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중상주의 시대나 자유무역 시대의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지만 자본수출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독점자본의 힘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식민지에 이식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독특한 단계를 이룬다. 즉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전근대적 관계를 파괴하고 자본주의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이러한 역할은 19세기 대영제국에서도 일부 있었고, 마르크스는 이 점을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제국주의가 낡은 전근대적 사회구성체를 유지시킨다는 인식은 일면적이다.1) 자본주의 세계는 여전히 제국주의 단계이고 그 안에는 제국주의 모국과 식민지·종속국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제국주의 모국에서도 식민지·종속국에서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이고 또 지배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단, 그 안에서 제국주의 모국의 정치경제가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고 식민지·종속국의 정치경제는 2차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난 10여년 사이에 식민지·종속적이었던 나라가 아(亞)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수준에 도달하여 기성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과 주도권에 도전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자본주의적으로 다극화되었다. 그런 각도에서 보더라도 세계는 지금 자본주의로 통일되어 있다.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뜻을 같이하지 않지만 자본주의는 통합된 하나의 세계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에 관한 이론적 언급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사료되어 생략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를 살펴보면서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듯이 패권의 교체를 중심으로 말한다. ‘글로벌 사우스’니 다극화니 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 ‘글로벌 사우스’라는 것은 미·서구 제국주의 권역 이외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것은 실체가 불분명하다. 지금 세계가 미·서구 제국주의와 ‘글로벌 사우스’의 대립과 투쟁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선발 제국주의 안에도 모순이 있고 ‘글로벌 사우스’ 안에도 모순이 있다. 무엇보다 ‘글로벌 사우스’ 안에도 제국주의 또는 아제국주의화 한 국가들이 있고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 상태에 있는 나라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주장처럼 세계질서가 다극화로 재편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다극화돼 있다. 오히려 그렇게 다극화된 질서 속에서 미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다투고 있다.


  이런 공시적 차원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통시적 차원이다. ‘자본주의의 미래 안녕한가?’ 라는 지점이다. 사람들은 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무슨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한때 네오콘들에 의해 미국의 유일패권이 주장됐지만 그것은 새천년 초입의 IT 거품 붕괴와 9.11테러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종언을 고했다. 발제자는 4월혁명 50주년 토론회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특히 민족주의적 경향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쇠퇴를 주목하면서 그것이 중국의 득세라든가 ‘글로벌 사우스’의 도전에서 온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미 제국주의의 쇠퇴는 그런 자본주의 불균등발전에서 오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쇠퇴이다. 미 제국주의 패권의 쇠퇴는 미 자본주의 자체의 쇠퇴에서 비롯되고 있고 미 자본주의 쇠퇴는 미·서구 선진 자본주의의 공통된 경향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지금 역사적 쇠퇴에 직면해 있고 사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물론 110년 전에 레닌은 이미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사멸하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이후 1세기 동안 살아남았다. 레닌은 그 책에서 자본주의가 왜 사멸하는지 그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주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어떤 생산양식은 더 이상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수명을 다한다고 언명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생산력을 발전시키는가? 하나는 세계시장을 형성하는 것을 통하여(상품관계), 또 하나는 더 많은 인간을 임금노동자로 만드는 것을 통하여(자본-임금노동관계), 그리고 자본의 축적을 추동력으로 하여! 그런데 이 추동력이 동력을 잃으면 자본주의는 쇠퇴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축적의 추동력은 자본의 이윤이고, 자본의 이윤은 이윤율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적절한 이윤율은 생명과 같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본의 이윤율이 서서히 저하하더니 드디어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이자율이 0% 내지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평균이윤율이 낮아졌다. 이 경향은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경향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표면화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이고 1970년대에 뚜렷이 가시화되었다. 발제자는 이때부터 자본주의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다. 이때 이전까지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윤율저하 경향은 법칙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윤율은 저하하고 있었다. 이 지점을 아직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발제자는 그 이유를 일차산업 부문에서의 노동생산성의 상대적 저조에서 찾는다. 그로 인해 생산재를 생산하는 Ⅰ부문의 가격(가치)이 Ⅱ부문인 임금재의 가격(가치)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져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점차 고도화한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윤율 저하의 단일한 효과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윤율 저하에 따른 투자 저하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를 극복하고자 자본은 케인스주의 처방대로 돈을 풀었지만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물가만 올랐다. 이게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이 스태그플레이션 앞에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파산했다. 그리고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뒷받침하는 공급주도의 경제학이 등장했다. 재정과 금융을 긴축하고 노조를 탄압하여 임금을 깎고 사회복지 지출을 줄이고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레이건과 대처의 이런 신보수주의 정책으로도 이윤율이 회복되지 않고 투자 기회가 열리지 않자 클린턴과 블레어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생산과 금융의 세계화를 들고 나왔다. 이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그러나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자본주의의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 축적체제로 자본의 착취도(이윤몫/임금몫)는 높였지만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정보화와 자동화를 추진한 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이윤율은 기대한 만큼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침체2)의 늪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성장률이 극히 저조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해 더욱 실망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출산율이 인구재생산 수준인 2.1명 이하로 떨어지더니 갈수록 심해졌다. 1인당 소득도 감소하고 인구도 감소하는데 투자기회가 늘어날 수 없다. 이렇게 투자유인(이윤율)도 투자기회도 위축된 상황에서 자본은 고이윤과 투자기회가 보장된 시장을 찾아 해외로 나갔다. 이게 세계화였다.


  이 세계화는 선진·선발 자본주의 경제의 쇠퇴를 재촉했다. 일본만 잃어버린 30년을 보낸 것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 전체가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반면 이른바 신흥시장은 세계화 덕분에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을 계속했다. 이로써 선발 자본주의와 후발 자본주의 사이에 불균등발전이 가속화됐다. 그 결과 제국주의는 다극화되었고, 다극화된 세계자본주의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주도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미국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트럼프는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유일패권 재생산에 맞게 구축된 국제질서(팍스 아메리카나)를 파괴하려 하고 있다. 자유무역 질서는 물론 국제정치 질서인 유엔의 해체도 불사하려 하고 있고 캐나다와 그린란드 영토 탈취까지 기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은 쇠퇴하는 반면 중국은 계속 성장하여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중국의 고도성장은 세계시장 덕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선진자본주의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진 이후 고도성장에서 중도성장으로 내려앉았다. 선진자본주의와 중국자본주의는 디커플링(decoupling)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세계자본주의가 침체하면 중국자본주의와 신흥시장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격받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선진자본주의권이 장기불황으로 쇠퇴하면 중국을 비롯한 후발자본주의권도 타격을 받아 퇴조할 것이며(세계시장이 통합된 오늘날 decoupling[탈동조]은 없다!) 이에 따라 노-자간 계급모순도 첨예해질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있는 속에서 세계는 격변하고 있다. 발제자는 5년 전부터 격변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1년이 다르게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이를 분야별로 살펴보자. 


<2> 분야별(생략)


①  경제적

②  정치·군사적

③  사회문화적


2) 이념과 전략: 21세기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와 같이 세계 자본주의가 쇠퇴와 사멸을 향해 격변하고 있다면 세계의 노동자·민중은 이 정세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이념의 차원에서 세계 노동자·민중은 이런저런 패권질서냐(유일패권이냐 다극질서냐 하는 따위의), 이런저런 자본주의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몇 해 전 발제자를 찾아온 유럽 어느 나라의 공산주의 정당 대표단이 있었다. 그 분들은 중국을 앞세워 미 제국주의 유일 패권에 맞서 다극질서를 세우는 반제 전선을 세우자고 했다. 발제자는 장시간 토론하면서 중국 또한 하나의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이미 제국주의 세력 간의 다극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했다. 미·서구 제국주의 패권적 지배질서를 바꾸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지만 중화 제국주의와 동맹하여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은 제국주의 상호간 전쟁에 어느 편에 가담하여 투쟁하는 것이 되므로 원칙적으로도 맞지 않고 현 정세의 요구에도 맞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 독일에 맞섰던 것은 일리가 있지만 지금 미국을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반파시스트 연합을 구축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또 지금 조성된 정세는 각 나라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데 집중하기를 요구하는데 그 역사적 과제를 뒷전에 물려놓고 제국주의 상호간 질서의 변경에 주력하는 것도 맞지 않다.


  이때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지점이다. 1990년대 초 소련·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사람들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상실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 이데올로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유럽의 가장 강력한 이탈리아 공산당은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물론 사회주의 이념도 청산했다. 한국에서도 민중당 노동위원회는 『전망』이라는 잡지를 내면서 운동의 전망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패배주의, 기회주의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현실이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30년 이상 분투하고 있고 또 서유럽 나라들에서 옛 공산주의(스탈린식 공산주의든 유로코뮤니즘이든)를 고수하고 있지만 대중 속에서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회주의 사회로 변혁하는 길 이외에 없다. 차베스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아닌, 시장사회주의니 뭐니 하는 것들도 죄다 실패했다. 사실 구소련도 국가사회주의에서 시장사회주의를 도입하다가 붕괴했다. 하기야 일각에서는 소련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국가사회주의도 시장사회주의도 아닌 대안은 무엇인가? 어려울수록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일각에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고 김수행 교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김교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근거로 하는데, 사실 『자본론』 1권에는 그런 표현이 딱 한군데다. 다른 곳에서는 그냥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또는 ‘자유롭게 연합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굳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강조한 것은 실패한 구소련의 집단주의 원리를 부정하고자 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과 같은 인간형인지 아닌지가 모호하다. 즉 사회주의 사회가 성립하려면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되어야 한다는 지점이 희미해진다. 그리하여 자칫하면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지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구소련처럼 국가주의와 집단주의를 사회주의의 원리로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실패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할 것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사회주의는 집단주의라는 스탈린주의식 구분법은 비판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원리는 집단적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초기에는 집단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불어판(이것은 마르크스가 쓴 최종판이다.)에서 사회주의에서 소유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수정했다. 무슨 말인가?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소상품생산자 사회의 개인적 소유가 부활한다고 했다. 그러면 소상품생산자 사회의 ‘사적 개인소유’가 부활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생산자가 자기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는 개인소유의 부활이지만 생산수단을 사적 개인이 소유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유하는 형태로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는 소생산자의 개인소유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소유하는가? 개인들이 개인성을 유지하면서 연합을 이룸으로써이다. 즉 개인들의 연합에 의해서이다. 단, 이때의 연합이 공고한 연합이 되려면 사적 개인들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사적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개인으로 스스로 변혁되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사회주의 사회는 단순한 개인들, 사적 개인들의 연합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인 것이다. 이것을 발제자는 21세기 사회주의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종류든, 경제적 강제든 정치적 강제든. 외적인 강제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가 사회의 체제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성과 인간형까지 바꾸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변혁 전략은 달라져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시장경제를 계획경제로 바꾸고 또 생산수단의 소유를 사적 소유로부터 국가소유로 바꾸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인간성과 인간형을 바꾸는 일에 힘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국가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다. 생산수단은 국유화에서 사회화로 변할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만큼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면 생산력이 비상하게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필요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생산력이 최첨단에 이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고도의 생산력이 전제라기보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가 전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립된 상태나 자본주의·제국주의의 경제제재를 받는 상태에서는 인간의 필요욕구를 충족하기가 극히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나아가기는 매우 어렵다. 북한과 쿠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고 나서 생산양식을 사회주의화하겠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자본주의 강대국이 아니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주의의 생산력은 국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국제주의가 없는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의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일부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세계혁명이 아닌 혁명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국제주의적 관계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기본 전략이 되어야 한다.   


3. 현 정세 인식과 전망(2): 일국적 수준


1) 정세인식: 총체적 위기


가. 포괄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퇴조


  한국사회가 당면한 상황을 한마디로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쇠퇴로 규정된다면 일국적으로는 현 정치경제 체제의 퇴조로 규정할 수 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 쇠퇴와 더불어 한국사회 정치경제 체제의 퇴조를 보고 사람들은 격변기라고 인식한다.


  그러면 퇴조란 무엇인가? 한국 자본주의는 지난 60년 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 왔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고 나서 한국자본주의는 자본축적에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수량적인 면에서 이웃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바로 그 이웃의 잃어버린 30년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활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경제성장률은 최근 2%대에 머물렀고 10년 이내에는 0%대의 극저 성장률을 실현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렇게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이 저조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로는 안팎의 두 가지가 겹쳐 있다. 밖으로는 세계자본주의가 급격히 쇠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근린궁핍화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접근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국제무역 규모를 축소시킬 것이고 이런 무역규모의 축소는 세계자본주의의 축적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보호무역주의는 한국과 같은 수출주도형 경제에는 더 큰 피해를 입힐 것이다. 최근 국내외 국제경제기구나 경제연구기관들이 앞을 다투어 성장률 전망치를 1%대로 낮추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0%대로 전망치를 낮추는 곳도 있다.3)


  다른 하나는 국내적 요인이다. 경기변동적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내수 의존도가 낮은 데다 경제위기의 부하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고 있는 결과 긴축(고금리) 하의 물가상승으로 이중적으로 가계소득과 소비를 압박하고 있다.4) 그와 동시에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초과적 착취·수탈로 인해 물질적 삶이 극도로 피폐해져 있음에 따라 (구체적으로 양질의 일자리 부족, 높은 집값과 사교육비 등) 출산율이 저하하고5)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로 잠재성장률을 갉아먹고 있다.


  이렇게 경제성장 즉 자본축적이 퇴조하면 한국 또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처럼 경제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적 장기침체’의 늪에 빠질 것이다. 혹자는 한국은 아직 경제성장의 역동성이 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제자는 역동성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역동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노동생산성 향상 같은 기술적 요인 자체에서 오는가?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에서 필수적 요인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정치적인 요인이 활력을 결정한다. 소득 가운데 소비보다 저축을 많이 하여 투자로 돌리고 거기에 생산성 향상이 결합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경제주의적이다. 그보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즉 자본축적도 하고 기술혁신도 하면 자신의 물질적 삶이 나아진다는 기대가 있어야 열심히 일하고 혁신도 하는 법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그렇다! 이 기대가 깨뜨려지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되고 삶과 노동에 대해 소극적으로 된다. 일본과 유럽의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든 데는 한편으로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따라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도 하나의 큰 요인이지만 노동자들이 자녀를 낳지 않고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해 의욕적으로 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뒤늦게 선진자본주의에 도달하여 선진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쇠퇴를 답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국 자본주의의 퇴조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첨예화하고 있다. 총체적 위기를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사회가 언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는가? 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그 동안의 위기는 한국 자본주의가 추세적으로 상승하는 과정 속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난 어려운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면 이번 위기는 한국 자본주의가 퇴조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위기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현저하게 다르다. 말하자면 진정한 위기이다. 세계사적 위기 속의 한국사적 위기이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 상승기에는 자본에게 이 말이 타당하다. 자본은 공황과 같은 경제위기를 자본집중과 기술혁신을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란 이 말은 더 이상 자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말은 이제는 자본에게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에게 해당한다. 노동자·민중을 지배·착취·수탈하는 낡은 질서를 변혁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 분야별(생략)


①  경제적

②  정치·군사적

③  사회·문화적


2) 이념(지향목표)과 전략


가. 한국 사회운동의 이념(지향목표): 사회주의


  한국사회가, 한국 자본주의가 퇴조하고 있다면 그에 맞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한, 특히나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여 중진자본주의 수준을 거쳐 선진자본주의 수준에 이르고 있는 한 지극히 당연하다.6) 그런데 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소련·동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실상 부정되어 왔다.


  사회운동 활동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면서 위와 같은 사실을 희석시킨다. 조국통일을 목표로 활동하지만 그 후 사회주의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는 말이 그런 예이다. 또는 지금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지만 가슴 속에는 사회주의를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사회주의는 시렁에 올려놓은 떡이나 다름없다.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지향목표로 활동한다면 활동가의 삶과 활동 모습이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 또 명확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접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 그런 점에서 고 노회찬은 정직한 편이다.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말하고, 동료들에게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자고 설득했으니까.7)


  그런데 어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도모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이 말은 우선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실행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잘못되었다.8) 이것은 생산력주의이고 경제결정론이다. 게다가 ‘성숙’이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전면화 되었다는 것인가, 생산력이 고도화하여 자동화가 일반화되었다는 뜻인가, 자본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뜻인가 불분명하다.9) 또 이 주장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일국 차원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선진자본주의가 성숙되었고 쇠퇴기를 맞이했다면 선진자본주의/제국주의 나라들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자본주의가 덜 발달되어 있는 나라들이나 선진자본주의/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종속국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 러시아혁명(유럽 제국주의의 주변인 러시아)과 중국혁명(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이 각각 그러했다.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어느 정도인가? 아직도 개발도상국인가? 자본주의 우클라드가 부차적인가?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존재하지 않는가? 어느 것도 아니다 한국은 전일적으로 자본주의 우클라드가 지배하고 있는 전면적인 자본주의 사회이다. 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다.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여 선진자본주의 생산력 수준에 도달해 있다. 게다가 자본-임금노동자의 모순이 극에 달해 있다. 이런 곳에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로의 이행을 지향목표로 하지 않는 사회운동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운동의 지향목표가 사회주의로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어떤 사회주의를 말하는지가 얘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같은, 사회주의 이행의 대표적 사례였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하거나 사회주의로 이행한 후 그것의 유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앞의 세계적 차원의 논의에서 언급했으므로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체’이고 그때 ‘자유로운 사람’이란 사회적·이타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10) 그러나 한국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말할 때 한반도의 절반에 해당하는 북한의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을 말하지 않고는 사회주의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활동가들 상호간에도 그러하지만 대중과 소통할 경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북한 체제와 같은 것을 건설하자는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북한 사회가 사회주의인가 여부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입각한 노동자 착취가 일반적인가 아닌가(자본관계의 측면), 노동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으로 생산되고 교환되고 있는가(상품관계의 측면) 하는 것이 주된 판단기준일 것이다. 그것들은 자본주의 생산제관계의 두 축이기 때문이다.11) 이런 기준에서 보면 장마당이 일부 형성되어 있다고 하나 노동생산물이 기업 상호간에 상품으로 생산·교환되고 있다고 보거나, 관료층이 특권적이라고 하나 자본가계급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사회구성체의 토대인 생산양식의 측면에서는 북한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상부구조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고 세습 수령제로 통치되고 있는 지점이 문제로 된다. 그러나 이런 지점을 근거로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이 문제는 1990년대 초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사라진 상황과 장기간 미 제국주의에 의해 포위 공격받는 상황 등을 감안해서 바라봐야 한다. 또 사회주의 여부에 대한 판단의 최종적 기준은 사회구성체의 상부구조가 아니라 토대인 생산양식에 둬야 한다. 북한사회의 생산양식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미 제국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서방세계가 그토록 집요하게 북한을 적대시해 왔겠는가? 단지 반미·반서방 태도 때문일까? 김정은은 미국과 평화공존 하고자 애썼는데 미국이 이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북한의 사회경제 체제의 사회주의 성격을 무시하고 권력의 세습 수령제를 근거로 북한의 사회주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북한사회 상부구조의 비민주성 문제는 남한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져서 그 힘으로 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한반도가 통일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결에 이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 지점에 이르기 전이라도 스탈린주의(국가사회주의)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고,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사회주의 개념에 부합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 이행 전략문제(1):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체적 성격과 사회체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매우 특수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매우 상반하는 전략들이 추구돼 왔기 때문이다.


 <1> 식민지성 문제


  한국사회는 제국주의의, 구체적으로 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적으로 분단된 사회이므로 민족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사회주의 변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가? 이것은 실천의 문제이면서 인식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이와 관련 한국 사회운동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이른바 민족해방 조류로서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의 자주화와 남북통일이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과제라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 바탕을 둘 경우 사회운동은 민족적 과제 해결에 동의하는 부르주아 세력과 연합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비판적 지지 세력이 되는 것을 전략노선으로 삼게 된다. 이런 노선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줄곧 한국 사회운동의 주류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심지어 2024년 초 북측이 더 이상 남쪽과 상종하지 않겠으며 민족이니 동포니 하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을 철거하기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한국 역사에서 외세 즉 제국주의에 의한 민족적 압박이 얼마나 가혹하게 민중의 삶을 짓눌러 왔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운동의 인식이 얼마나 현실의 변화에 둔감하여 시대에 뒤쳐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민족말살 정책이 너무나 악랄하고 분명했으므로 한국 사회운동 안에서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되 당면해서는 민족해방을 목표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자명했다.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자면서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군대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무장해제를 위해 남북한에 각각 진주하면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한쪽은 해방군 다른 한쪽은 점령군이라고는 하나 그러했다. 이런 사정은 남과 북 두 개의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이 두 정부는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두 개의 국가로 굳어졌다. 그리고 이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고 남한에서는 불철저하나마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를 해체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남한의 자본주의는 자생력을 갖지 못한, 미 제국주의의 원조에 의해 유지되는, 기생적인 매판자본주의에 불과했다.12) 여기에다 국민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농촌에는 농민들의 대다수가 불철저한 농지개혁 이후 여전히 가난한 자작농이거나 소작농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로 되었다.  


  이에 관한 논의는 분단과 전쟁 시기에는 전면에 나타나지 못하다가 4월혁명 이후 남쪽 자체의 혁명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선배 운동가들 대다수는 이런 한국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변혁하는 혁명의 형태를 반제반봉건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했다. ‘인혁모임’13)의 선배 혁명가들이 그러했다. 이런 인식과 혁명전략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그대로 견지되었다.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 이후 고양된 변혁운동 안에서 일어난 1980년대 사구체 논쟁에까지 이어졌다.14)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이어졌다.


  이 인식과 노선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이 이론에는 자본주의가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생산양식이고 사회구성체라는 데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제국주의의 종속국에 대한 지배도 영원하게 동일한 형태가 아니며 제국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사회에서도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전개된다는 인식이 결여돼 있었다. 이런 교조적 인식 때문에 1960년 이후 65년이 지나도록 이 조류에서는 여전히 한국사회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지배가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있다거나 한국 자본주의가 아직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절반의 자본주의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다.15) 그리고 이에 따라 혁명적인 헌신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반미자주와 민족통일을 사회운동의 최고의 과제로 설정하고 이것에 대내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부차적 과제로 그것과 결합시키고 있다. 이런 인식의 지체와 그 지체된 인식에 근거한 시대에 뒤떨어진 실천이 한국 사회운동을 실패로 이끌고 있다.


  그러면 한국사회 사회구성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무엇인가? 식민지반자본주의가 아니라면 고 박현채 교수가 주장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인가? 그 또한 신식민지라는 제국주의에 의한 예속의 측면과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서구 선진자본주의의 발전단계의 측면을 기계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어떻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는가? 박현채 교수의 이론에서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지나놓고 보면 한국이 과연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는가라는 지점부터 묻고 싶다. 민족해방 조류처럼 일본제국주의 치하와 다를 바 없는 완전한 식민지라는 주장도 현실에 맞지 않고 신식민지라는 규정도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일제시대 선조들처럼 망국노인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인 신식민지 나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적 괴뢰국가로 탄생되었고 그 괴뢰국가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수평적 동맹국도 아니고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식민지도 아닌 독특한 형태의 종속국 즉 괴뢰국가이다. 미 제국주의는 일본제국처럼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카이로 선언 당시 루스벨트는 조선을 장기간 필리핀처럼 직접 통치하려고 했지만 얄타회담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단기간의 신탁통치 후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면 신식민주의 노선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독립시켜 주면서 경제적으로 지배·수탈하려고 했는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과 달리 미 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고자 한 동기는 경제적 수탈이기보다 지정학적인 이해관계였다. 한반도에 자신의 괴뢰(위성)국가를 세우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 소련, 일본 등 강대국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미 제국주의에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이해관계보다는 정치군사적인 이해관계였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한국에게 어마어마한 원조물자를 제공했다. 그 원조 규모는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에 버금갔다. 이런 원조물자를 판 대금(이를 대충자금이라 한다)으로 미군과 한국군의 군사비와 재정 투·융자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고 이 원조물자로 이승만 정권 시절 3백산업(제분, 제당, 면방직)이 생겨나게 됐다. 1960년대에는 이런 원조 대신 차관을 제공하여 경제개발을 지원했고 70년대 이후에는 차관과 함께 합작투자·기술제휴·직접투자로써 경제개발을 지원했다.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도 미국의 강권적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16) 이렇게 자본주의적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원받은 나라를 신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경제개발의 노선까지 지도받고 이웃하는 쌍둥이 건물에서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세운 나라가 신식민지가 맞는가? 일반적 신식민지 개념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이 겨냥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그렇게 개발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일본을 파트너로 하는 국제 자본주의 블록에 깊이 통합되게 함으로써 한국이 그 질서에서 이탈하여 북측과 통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이게 반통일이다!) 나아가 한국을 자본주의의 쇼윈도로 만들어 반공의 전초기지화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관철되었다.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를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트럼프는 한국을 부자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판이다.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와 반도체 기업으로 하여금 미국에 공장을 세우라고 강요하고 조선 분야에서는 기술적으로 도와주라고 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을 저지한다는 식민주의 개념에 의거하면 한국은 신식민지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자본주의는 군사적으로 미국에 깊이 예속되어 있다. 전시작전권조차 헌납한 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한미군사동맹으로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주권이 부정되고 있는 점에서 보자면 신식민지라는 규정도 부족하다. 한국은 이런 군사적 의존과 예속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정권을 이승만·박정희 정권처럼 미국의 대리정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군사독재정권을 축출한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최고 권력자는 어쨌든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있으며, 이것을 미국이 통제하는 군을 동원해 뒤엎을 수는 없다. 한국은 처음부터 괴뢰국가로서 만들어졌지만 그 괴뢰국가의 구체적 형태는 민주화 이전의 대리정권 단계로부터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하여 민중의 민주주의 의식과 역량이 고도화함으로써 더 이상 대리정권을 통해 통치할 수 없는 단계로 이행했다. 여기에는 한국의 산업적 발전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 따라서 한국은 미제의 식민지이거나 신식민지로 규정되면서 변화하지 않고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은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제의 괴뢰국가로 탄생되었지만 그 괴뢰성의 정도가 약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한미관계는 수평적 동맹국도 아니고 수직적 괴뢰국도 아닌 중간적 수준 또는 형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선은 식민지 반대운동이나 신식민지 반대운동의 결과물이 아니고 독점재벌과 특권계급의 착취와 수탈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계급과 민중을 탄압하는 군사파쇼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의 성과물이었다. 한국은 여전히 미 제국주의의 괴뢰이지만 꽉 잡힌 상태가 아니라 느슨한 상태의 괴뢰국가이다. 한국의 정권은 국내 정치경제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해 대체로 자율적이며, 군사안보에서는 가끔 미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한다.


 <2> 반자본주의성 문제


   다음으로 한국사회의 대내의 사회적 관계 특히 생산관계를 보면, 한국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광업, 공업, 건설업 등 산업의 대부분이 자본가적 기업에 의해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 경제활동인구의 대부분이 자본제 부분에 종사하고 있다. 소상품생산이 다수인 농업은 경제활동 인구의 5% 내외를 차지할 뿐이고, 그나마 다수는 노인들이다. 뿐만 아니라 농업부문에도 상품생산의 운동법칙에 따라 부농과 빈농으로의 양극분화가 진행돼 왔고, 부농의 일부는 농업자본가로 전화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를 피고용인으로 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사회를 아직도 반쯤밖에 자본주의화하지 않는 반(半)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것인가.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는 한국경제는 재벌이 지배하고 있는데, 재벌은 전근대적인 족벌소유를 하고 있으므로 한국경제는 반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업의 가족소유는 전(前) 현대적인 것일지언정 자본주의적인 것이지 봉건적(전근대적)인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기 영국의 “기업형태는 도로, 운하, 철도, 그리고 광산 등 제 부문에서는 주식회사 형태의 대규모 기업도 있었으나 전형적으로는 개인 또는 공동기업(partnership)이었다.”17) 산업혁명 시기 사회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므로 가족소유는 봉건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한국의 재벌은 독점자본이다. 초과적인 자본집중과 시장지배력을 가진 독점자본이다. 한국의 압축성장을 위해 노동자의 무권리와 함께 이런 초과적 자본집중이 국가에 의해 조장되었다. 한국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재벌이 주도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자본주의는 이미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이다. 한국자본주의의 주역인 재벌 대기업은 이미 국내적 독점자본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이다.18) 제국주의의 주된 지표는 자본수출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한국자본주의는 1980년대부터 동남아시아로 자본을 수출해 왔으며 1990년대에는 김우중의 ‘세계경영’에서 보듯이 전 지구적으로 자본을 수출했다. 그리고 지금은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동북아시아를 비롯해 개발도상국들에 자본을 수출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 같은 선진자본주의 권역에도 자본을 수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군사적으로 미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와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진출해 그 나라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나라를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발제자는 20여 년 전부터 한국자본주의를 아(亞)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 그 아(亞)자를 떼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의 모임인 3050클럽19)에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의 모임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인도·태평양 파트너20)로 매년 초청되고 있다. 그러니까 국군 병사는 물론이고 야당 국회의원들마저 제국주의 나라 군대나 정치인들처럼 자기나라 국기를 배지로 만들어 가슴에 붙이고 다니고 있다.


  한국사회의 성격이 이제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라면, 그러나 여전히 미 제국주의에 군사·정치적으로 깊이 예속되어 있는 괴뢰국가, 위성국가라면, 그로 인해서 그 질서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고자 파쇼통치가 온존되고 있다면 이런 사회를 어떻게 성격규정을 해야 할까?


  한국사회는 사회구성체 차원에서는 군사·정치적 괴뢰성과 사회·경제적 자본주의성이 중첩되어 있는 사회구성체이다. 한 쪽은 미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있는 측면이고 다른 한쪽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다른 나라들을 제국주의적으로 착취·수탈하는 측면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는 밖으로 미 제국주의의 괴뢰성을 타파하는 동시에 안으로 한국자본주의의 제국주의성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만 문제 삼고 한국자본주의의 제국주의성은 외면한다면 그것은 일관성이 없고 정당성이 없다. 그러므로 반미만 외치고 우리 자신의 제국주의(그것은 곧 자본주의이다)에 대한 반대는 외치지 않는 민족주의는 기만적이다. 그리고 반동적이다. 


  반자본주의사회론21)은 인식적으로 오류이고 실천적으로도 잘못을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세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통일뉴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올바로 이해하자」(2008.02.20., 문경환 기고)에 따르면 한국사회가 반자본주의 사회인 근거는 크게 정치 분야, 경제 분야, 군사 분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사회구성체 성격을 가늠하는 기본 축인 경제 분야를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체제가 체질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 ▲민족산업, 토착자본이 파산하고 외국자본에 빌붙어 사는 자본이 비대하다는 점 ▲채취공업과 가공공업, 기계공업과 경공업, 내수산업과 수출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심한 불균형이 존재하여 균형 잡힌 경제로 되지 못한 점 ▲노사대립이 극도로 치열하다는 점 ▲농업에서 봉건적 생산관계가 존재하고 미국의 잉여농축산물 수입으로 농촌이 붕괴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한국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자본주의 경제 형태를 띠고 있다”고. 그러나 그는 한국경제를 지배하는 독점자본이 외국에 빌붙어 사는 것이 아니라 초국적자본화 해 있다는 현실에 눈감고 있으며, 농업에 봉건적 생산관계가 존속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농업이 급속히 자본주의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점도 눈감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는 각각의 지점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총체적으로 봤을 때 한국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일반에 비해 특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특성을 가진 자본주의라고 명명할지언정 반(半)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냐 하는 것은 생산양식이 얼마나 자본주의적으로 되었는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 생산양식 즉 자본-임금노동관계, 자본생산관계가 얼마나 지배적으로 되고 또 일반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고도로 자본주의화한 사회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거의 전일화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는 결코 반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전면적으로 자본주의화한 사회이다. 다른 한편 일반적으로 반봉건사회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사회를 의미하는데, 이런 구별법에 따르면 반자본주의사회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의 사회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결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의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를 반자본주의사회라고 명명할 경우 한국의 특수한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사회로 오해될 위험성이 있다. 그런 문제가 있는 반자본주의 규정에 비해 괴뢰국가적 요소와 파쇼적 요소의 온존으로 인해 심하게 지대추구적이고 초과착취적인 자본주의 즉 천민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이 훨씬 온당할 것이다.


  한편 실천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를 반자본주의사회로 명명할 경우 여전히 전근대성 또는 봉건성을 타파하여 균형잡힌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될 것이다. 즉 친 자본주의적이 될 것이다. 반면에 천민자본주의로 파악할 경우 현재의 천민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계급간의 모순이 심각하여 그것을 타파하지 않고는 노동자·민중이 최소한으로도 인간답게 살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타파하는 것 및 그것과 결부하여 진보적(반反자본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진보적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당면과제가 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전자는 개혁적인 것이 될 것이고 후자는 혁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22)  


<3> 천민자본주의 파쇼 정치경제 체제 문제


한국 사회의 구성이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체 차원에서만 파악해서는 그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한국 자본주의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구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나쁜 사회적 지표를 그렇게도 많이 가지고 있는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 세계 최고의 중대재해율, ...


  이런 것들이 초래된 데는 위에서 살펴본 대외적 예속 속에서 스스로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하위 정치경제 체제가 있다. 그것이 천민자본주의 파쇼 체제이다. 이 체제는 박정희가 국가주도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만든 것이다. 박정희는 이승만 시기의 매판재벌을 산업자본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매판자본의 산업자본화는 재벌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매판재벌은 천민재벌로 변신했다. 이들은 재벌이라는 점에서, 정치권력과 유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판재벌과 동일하지만 독자적인 생산기반 없이 제국주의 나라 상품의 판매자에 불과한 ‘매판’에서 자기 스스로 생산기반을 가지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독점자본이라는 점에서 매판재벌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생산력에만 의거하지 않고 정치적 결탁을 통해 특혜를 추구하는 점에서,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시장을 독점하여 기생적으로 지대적 이윤을 추구하는 점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초과착취하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과 그 족벌이 거대 기업집단을 폐쇄적으로 소유·경영하는 점에서 천민적이다.


   한국사회의 지배계급은 이 재벌23)에 빨대를 꽂고 있다. 재벌 총수일가뿐 아니라 거기에 종사하는 전문경영인(임원)들이 일차적으로 그 초과이윤을 분배받고 있고, 다른 일부는 대규모 주식 소유자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주식시장을 통해 외국인이라는 이름의 미 제국주의 주주들에게 분배되고 있다. 이들의 초과이윤 전유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및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떡값이 분배된다. 그리고 사외이사 형태로 지식인들에게도, 대형교회에도 이들의 이윤이 분배된다.(종교인 소득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리고 재벌 건설사를 통해 부동산 투기를 주도함으로써 지주적 자본가 집단에게 축재의 기회를 제공하고 노동자가 생산하고 자본이 전유한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다. 심지어는 독점재벌 모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 잉여가치의 일부가 분배된다. 그리고 이로써 한국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극심한 양극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재벌의 경제지배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제약 없이 관철되고 있어서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재벌 대기업을 비롯한 대기업과 중소영세 기업 노동자 사이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신분적 수준의 양극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은 이 정치경제 체제를 타파하는 것을 당면변혁 과제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제에 의한 국가적 예속 하의 자본주의라는 한국사회의 근본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치경제 체제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고 있는 현실적 족쇄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선진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사회적 지표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고 사람들의 삶이 극히 비인간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계급 대립이 이 문제, 이 과제를 축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천민적 자본주의는 정치권력에 의해 그것의 성립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정치권력에 의해 그것이 유지되고 있다. 그것의 유지는 떡값(그것은 특혜를 자기 재벌에게 유리하게 분배받기 위한 수단이다.24) 보험이고 뇌물이다!)과 정치자금 제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지만 억압적 국가기구의 탄압에 의해 보증되고 있다.25) 입법과 행정, 사법을 가릴 것 없이 억압적 국가기구는 노동계급과 민중의 민주적 제 권리를 박탈한다. 이런 착취·수탈과 억압에 정당성이라는 외피를 씌우기 위해 법이 동원된다. 입법에는 노동계급과 민중의 진출이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보수양당이 돌아가며 정치권력을 가지면서 그렇게 한다. 진보정당은 군소정당을 넘어서지 못한다. 행정권력은 보수양당의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출되어 노동계급과 민중의 접근을 봉쇄한다. 그리고 행정권력에 대한 민중의 통제는 선거에서만 행해진다. 사법권력은 더 심하다. 법관들은 어떠한 국민의 통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구성되거나 국회와 대통령의 간접적 통제만 받는다. 이들은 체제의 최후의 보루이다. 사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이고, 재벌 3.5의 법칙이 관철된다. 그러므로 한국에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없다. 한국의 정치는 선거독재이거나 선거민주주의이거나 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26) 이런 상태에서 노동자·민중의 민주적 제 권리는 극심하게 제약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또는 일반민주주의 주요 지표인 사상의 자유와 노동자들의 결사와 파업의 자유는 극심하게 제약되고 있다. 그것을 제약하는 법률이 노동조합법과 국가보안법이다. 이 두 반민주악법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는 국정원과 검찰·경찰·법원 등 폭압기구들이 민중의 통제밖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상부구조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파시즘, 부드러운 민간파시즘이다. 이런 파쇼적 반민주 악법과 폭압적 국가기구가 엄존하기 때문에 이번 12.3 쿠데타에 국가기구의 우두머리들이 대거 동원되었고, 극우 태극기부대가 반공과 반국가세력 척결을 외치며 난동을 부릴 수 있었다. 


이런 지점들을 종합해 볼 때 사회구성체의 하위 체제 수준에 있는 정치경제 체제는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이다.


다. 이행 전략 문제(2): 민주주의 혁명 단계 설정 문제


<1> 단계론 문제


  한국사회가 ‘괴뢰국가 통치하’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이면서 천민자본주의 파시즘 정치경제 체제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운동은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중간단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중반 다수의 학생운동가들이 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들은 남한 자본주의 국가의 야만적 폭력성에 분노하여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고무되어 사회주의와 혁명으로 급진화했다. 이 때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일부는 중간적 혁명단계 없이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자는 생각을 가졌다. ‘구로 소비에트’라는 개념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다른 혁명 단계를 설정하는 것을 ‘단계론’이라고 비판했다.27) 그러나 이런 초급진적 운동관을 가진 운동가 그룹28)은 탄압으로 무력화되고 이후 중간단계를 설정하는 혁명 개념이 확산됐다. 이런 개념에 따라 CDR(시민민주주의혁명), NDR(민족민주주의혁명), PDR(민중민주주의 혁명),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등으로 중간적 혁명단계를 설정하는 전략관이 일반화됐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여 선진 자본주의화 하면서 중간적 혁명단계 없이 곧장 사회주의로 이행하자는 흐름들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 이런 흐름의 일부는 분명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지만 다수는 ‘혁명’을 명확히 하지 않고 사회주의 ‘이행’이라고 애매하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사이의 기간에는 이행기 강령을 가지고 대중을 의식화하고 이런저런 정치투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어느 경우에나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중간 혁명단계를 설정하지 않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때 이들은 실천적으로 대개 강성 경제주의로 경도되거나29) 개혁주의 정치에 머무르게 된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민주주의 혁명 개념이 없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쇠퇴하고 있고 그 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려면 사회주의 혁명 밖에 길이 없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고도로 자본주의화 했지만 그 사회구성체와 그 하위의 정치경제 체제는 괴뢰국가적, 파쇼적, 전(前)현대적(전근대적 즉 봉건적·반봉건적이 아니지만 현대 자본주의적이지 못한 상태. 예컨대 대기업 가족소유·경영) 등 낙후되고 억압적인 요소를 다량 지니고 있다. 그것과 맞물려서 노동자·민중의 의식도 사회주의 의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민주주의 의식에 머물러 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중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민중의 의식이 이런 상태에 머무른 데에는 소련·동구 등 현실 사회주의 붕괴도 한몫을 했다. 그 원인이 어떠했건 이런 낙후된 노동자·민중의 의식상태에서 중간단계 혁명 없이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하려는 것은 그 도전정신은 높이 사야 하겠지만 그것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거나 멀다. 사회주의는 공공연하게 선동연단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실을 인정하여 사회주의를 선전선동하지 않고 이행기 강령 같은 것으로 대중을 의식화하고 결집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절박한 변혁과 혁명 욕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거나 ‘촛불혁명’이니 ‘빛의 혁명’이니 하며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것도 노동자·민중 속에 혁명과 변혁을 향한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도 민주주의 혁명도, 어떠한 혁명도 목표로 하지 않고 막연하게 소극적으로 이행기 강령을 내세우는 것은 실천적으로 무력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중간적 혁명이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전면적으로 타파하는 것을 당면목표로 하지 않는 한계 안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중간단계 혁명이 필요하다. 이렇게 자본주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혁명을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해방 혁명도 넓은 의미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민주주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 다만 어떤 민주주의 혁명이 요구되는가에 대한 판단이 문제로 된다.


<2> 지금은 민족해방 혁명 단계가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 단계다.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설정하는 경우에도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 노선에서는 사실 민족해방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의 전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자주, 민주, 통일‘을 기치로 내세우지만 민주는 전술적인 지위를 가지고 전략적으로는 자주·통일이 현 상태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간 혁명단계로 된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성격을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로 보건 식민지반(半)자본주의 사회로 보건 식민지로 지배되는 사회로 인식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발제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문제는 사회구성체적 수준의 문제로서 국가와 사회의 근본문제에 해당한다. 이것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당시 한반도 남쪽에 미제가 일제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들어오고, 그 새 제국이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체 성격을 결정하고, 또 그것이 여전히 일정한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미·반공은 한국의 국가정체성이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로서 선진자본주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미 제국주의에 깊이 예속돼 있고, 그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완전한 자주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문제는 민족해방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두 문제인 예속성과 자본주의성은 거의 동시에 부과되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두 과제 역시 거의 동시에 실현될 것이다.


  이를 조금 분석해 보면 이렇다. 미제는 결코 한국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미 제국주의의 지배가 무너지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한국이라는 군사적 요충을 상실하는 것이면서 동북아시아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며, 전 지구적 지배에서 커다란 후퇴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제가 한국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는 순간 노동자·민중은 즉각 남북통일을 추구할 것이고 이때 통일은 십중팔구 사회주의 지향의 통일이 될 것이다. 북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의 진보적 역량이 힘을 합쳐 민족적·국가적 통일을 이루려면 비록 연방제라 하더라도 사회주의 원리를 대폭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남한 자본가계급으로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제와 남한 지배계급은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용인할 수 있을 테지만 한국의 민족해방은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각성과 진보적·사회주의적 의식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해방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미 제국의 지배 하에서는 어떤 수준, 어떤 형태로든 파쇼통치가 유지될 것이고 그러한 한 사회주의로 나아갈 주체역량이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민족해방 과정 없이 곧장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할 경우 사회운동은 반사회주의 국내 지배세력과 미 제국주의라는 이중의 적대세력에 직면하여 고립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민족해방은 사실상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 속하고 그 혁명의 대외적 측면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해방은 사회주의 혁명단계에 속하므로 그것을 곧장 실현시키고자 하지 않는 한 중간단계 혁명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중간단계 혁명은 민족해방 혁명이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민족해방 혁명도 넓은 의미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에 속한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예속되고 분단된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 속한다.  


  이와 관련, 사회운동의 민족해방 흐름에서는 “자주 없이 민주 없다”고 외쳐왔다.30) 최근에는 심지어 “자주 없이 생존권 없다”는 표현까지 사용되고 있다.31) 그러나 전시작전권이 회수되지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도 심지어 종전선언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본주의는 저개발국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자본주의로 이행했다. 그리고 군사파쇼 통치로부터 불완전하나마 부르주아 민주주의 통치(또는 부드러운 파쇼통치)로 이행했다. 이런 전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이 진전된 바 있고, 전시작전권은 회수될 뻔 했고, 종전선언도 이루어질 뻔했다. 비록 미제의 방해에 의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간의 역사는 이처럼 반미자주가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보다 민주주의가 반미자주와 통일을 가져오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 왔다. 물론 그 둘은 원인과 결과로서 맞물려 있지만 말이다. 다만 한국사회가 이룬 민주주의는 불철저한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연성파시즘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였기에 반미·반제 민족자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반미·반제 민족자주와 통일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급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반미 자주와 통일 과제는 노동자·민중이 정치권력을 쟁취하여 천민자본주의 파쇼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하고 그 변혁을 심화시켜 나갈 때, 미 제국주의와 독점재벌을 위시한 국내 지배세력이 힘을 합쳐 반혁명을 꾀할 때, 필시 의제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때 사회주의 이행도 동시에 의제가 될 것이다.


<3> 현 시기 한국 민주주의 혁명은 친자본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반자본 민주주의 혁명이다.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은 급진적 민주주의 혁명단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정치에서 당면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양극화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문제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가 하위 체제로서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의 측면과 사회경제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정치의 측면부터 살펴보면, 사회운동은 대개 한국의 정치가 파쇼적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진보적 정치학자인 김세균과 최장집32)은 모두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행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되었고 다만 경제적 민주화만 이루면 완결된 민주사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윤석열 정권의 친위 군사쿠데타 기도에서 보듯이 한국사회는 여전히 파쇼 통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정치적 주류로 버티고 있다. 이들은 입법, 사법 및 행정과 군부 같은 국가기구 안에 똬리를 틀고 있고 영남권과 강남3구를 비롯한 서울의 부자촌을 지역적 기반으로 가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보수 정치세력들 즉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교대로 입법과 행정 권력을 차지해 왔으며 민주화 정치세력은 그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주류가 되고자 노력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비주류이다. 민주화 세력 또는 자유주의 세력이 국가권력의 주류가 되려면 현재의 파쇼체제를 타파해야만 한다. 그리고 수구보수 세력을 떠받치는 국가기구와 지역기반 모두를 해체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화 정치세력 또는 자유주의 정치세력 또한 지역주의에 기반하고 있고 또 파쇼 악법과 억압기구를 해체시킬 의향이 없다. 파쇼 악법이나 억압기구들이 해체되면 수구보수 세력이 약화되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이 약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주주의를 외치고 파시즘을 경계한다고 떠벌이지만 실제로는 수구보수 세력의 집권과 극우 정치세력의 약진 못지않게 노동계급의 정치적 약진을 경계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국회에서 절대적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과 노동악법을 철폐하지 않아 왔다. 그것들이야말로 파쇼 통치의 상징물인데 말이다. 그들은 또 수구보수 세력과 마찬가지로 미 제국주의의 요구에 부응하고 독점재벌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 그래서 그들의 본질은 위선과 기만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운동의 전략은 이 보수양당 정치세력 독점과 그들이 떠받치고 있는 파쇼통치 체제를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세우는 데 모아져야 한다. 단, 그 파쇼는 글자 그대로의 파쇼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외양을 띤 부드러운 파쇼다. 한국 파쇼는 무시되어서도 안 되고 과장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 단계 한국 사회운동의 과제는 반파쇼 민주주의 혁명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이것에 의한 민중권력 쟁취이다.  


  한편, 이런 파쇼체제는 토대인 천민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의 상부구조이다. 이 상부구조는 무엇보다 독점재벌의 이해와 요구에 상응한다. 파쇼 통치체제는 지난날 미 제국주의의 조종 하에 정치군부를 핵심으로 하는 국가기구의 주도 하에서 독점재벌 형태의 독점자본을 형성하는 모습으로 유지돼 왔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의 거센 저항으로 이 군부파쇼 체제는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고, 이에 미 제국주의는 예방혁명으로서 민주화 이행을 추진했다. 6월 민주항쟁은 그런 예방혁명이었다.33)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이 항쟁의 의의가 훼손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의 항쟁이 없었다면 예방혁명 또는 수동혁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줄기차고 가열차게 투쟁해 오던 민주화운동이 마침내 결절점에 이르러 전두환 일당의 군부파쇼통치를 종식시킨 것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이었다.


  그러나 예방혁명에 의한 이런 군사파쇼통치 종식은 진정한 민주주의 통치체제 수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철저한 민주화 즉 노태우의 민선 군사파쇼 체제와 김영삼의 민선민간 파쇼체제로 나아가다가 김대중에 이르러 연성 민선민간 파쇼체제로 진화했다. 이후 이 파쇼 통치체제는 노무현을 거쳐 더욱 완화되다가 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며 과거로 후퇴했으며, 촛불혁명 덕에 등장한 문재인 정권에 들어 다소 개선되다가 윤석열 정권에 들어와 다시 역전되어 개악되는 등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렇게 민주화가 서서히 진행되는 동안 독점재벌은 양적·질적으로 자신의 힘을 키워서 초국적 자본의 반열에 올랐으며 한국경제를 완전히 지배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제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1970년대의 ‘민간주도 경제’ 요청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초 김영삼 정권 등장 이후 마침내 정치권력에 할 말을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라는 이건희의 발언은 이런 상황의 반영이었다. 이렇게 독점재벌의 경제 지배력이 비대해지면서 재벌의 무분별한 공격경영으로 외환위기가 초래되었음에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취약성과 김대중 정권의 친자본 정책 탓에 IMF 사태가 재벌해체의 계기가 되지 못하고 독점재벌이 공적자금을 비롯한 국가의 지원으로 재생하면서 오히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되었다. 이는 국제 금융자본에게 문호를 여는 대가로34) 이루어졌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면 드디어 독점재벌의 지위가 정치권력의 우위에 서는 상황으로 변화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발언은 이런 상황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의 파쇼통치는 이제 독점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상부구조로서의 파쇼통치가 아니라 사회구성체의 토대인 천민자본 즉 독점재벌의 경제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그리고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폭력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전환되었다.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전도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파쇼통치를 문제로 삼는 경우에도 그것과 독점재벌의 경제지배와의 연관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보수양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제도정치는 독점재벌의 이해와 요구에 누가 더 잘 복무할 것인가 하는 경쟁의 장으로 된다. 그들 서로 간에 아무리 거친 표현을 쓰며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그것은 권력다툼에 불과하고 알맹이는 독점재벌의 이해와 요구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운동의 반파쇼 민주화 투쟁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반파쇼 활동의 불철저함을 비판해야 할 뿐 아니라(국가보안법·노동악법35)을 철폐하지 않는 데서 볼 수 있는) 그것을 넘어 파쇼통치와 연동된 독점재벌에 의한 노동자·민중 착취·수탈 타파를 겨냥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파쇼체제 타파는 독점재벌이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방도로서 파쇼체제 타파가 되어야 하며, 독점재벌을 해체하고 지대추구세력을 안락사 시키며 노동자·민중의 경제적·사회적 삶을 획기적·질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현 단계 민주주의 혁명은 친자본이 아니라 반자본의 성격을 지니며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혁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 민주주의는 상부구조에서 파쇼적 요소를 타파하는 동시에 그것의 물적 토대인 독점재벌이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중심에 두는 급진적 민주주의여야 하며, 동시에 이 민주화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으로써만 달성된다는 의미에서 급진민주주의혁명인 것이다.


  이 혁명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전면적으로 타파하는 혁명은 아니지만 그것의 특수한 한국적 하위 정치경제 체제인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를 타파함으로써 한편으로 노동자·민중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착취를 대폭적으로, 양적이 아니라 부분적이지만 질적으로,36) 약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민중의 경제적·사회적 삶을 획기적으로, 부분적이지만 질적으로, 개선하는 혁명이다. 그것은 또 한국사회가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거쳐야 할 현 단계 혁명이고 혁명의 관점에서 본 최소강령의 실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개량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재벌을 해체하면 대기업이 문 닫는데 그러면 경제가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를 변혁하는 급진민주주의 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민주화인 군국주의 군부와 재벌 해체에다 유럽의 68혁명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내에 머무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온건하다. 그러나 파쇼통치와 함께 독점재벌의 노동자·민중 지배와 초과적 착취·수탈 모두에 파열구를 내고 계급역관계를 노동자·민중 우위로 질적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4> 반(反)신자유주의는 혁명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한국 노동자·민중에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노동운동 내 이른바 좌파에서 김소연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는데, 김세균 교수를 비롯한 115명의 지식인이 김 후보를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김소연 후보 지지 기자회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자유주의 반대 민주혁명이야말로 오늘 인류사회가 이루어야 할 시대적 과제임을 말해준다”37) 김세균 교수는 2013년에는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경연에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최종적 위기 국면인 지금 ‘반(反)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이 필요하며, 대안은 자본주의 자체의 지양, 즉 사회주의“라고 말했다.38)


  김세균 교수 등 이른바 노동운동 내 좌파 이론가들은 지난 수십 년 간의 민주화운동을 성찰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이들의 사고는 한 마디로 반(反)신자유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반(反)신자유주의가 과연 민주혁명이 될 수 있는가이다.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 반대와 사회주의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부터 대대적으로 도입되었다. 한국에서는 1997년 IMF 사태로 신자유주의가 폭력적·압축적으로 도입되었으며, 그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에 심대한 파장을 미쳤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한국사회의 체제가 ‘87년 체제’로부터 ‘97년 체제’로 전환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대해 다른 일각에서는 이를 경제주의적 편향으로 비판한다. “이들은 지난 민주정부 10년과 이명박 정부를 동일시하는 프리즘으로는 ‘풍부한’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치, 나아가 국민 정치적 공간에 대한 ‘유연한 헤게모니적 전략’의 가능성을 포착하지 못한다”39)고 지적한다. 어쨌든 신자유주의 반대는 민주주의에 기여하지만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주도 축적체제40)로 이해되기도 하고 노동유연화 체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 이것과 포드주의 축적체제를 대비시키기도 한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및 그것과 결부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 이른바 황금기에 금융자본을 규제하고 산업자본을 우대하던 관계가 뒤바뀐 것을 강조한다. 반면 좌파들은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화 등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로 착취도가 높아진 것을 강조한다. 전자로 이해하는 경우, 그것이 민주혁명이 되려면 포드주의 축적체제로부터 신자유주의 축적체제로의 전환이 반혁명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산업자본 분파와 금융자본 분파 사이의 우위가 바뀐 것에 불과하고 직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계급관계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도 반혁명도 아니다. 다른 한편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한 초과착취는 어떤가? 착취의 강화는 계급관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므로 이것이 바뀌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급 관계를 질적으로 바꾸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 축적방식의 변화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소유·지배 관계가 질적으로 변하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도입될 때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가 그것을 추진했다. 신자유주의 전환은 극우정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민주당 치하에서 이루어졌고,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우경화해서 이루어졌다. 어느 경우나 기존 계급관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케인스주의로의 복귀도 기존의 계급관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점 말고도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론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는 선진자본주의 일반의 현 시대 과제와 한국자본주의의 현 시대 과제를 구분하지 않는다. 선진자본주의 사회 일반의 과제를 그대로 한국자본주의의 과제로 도입, 설정한다. 선진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자본주의의 모순이 성숙되어 있고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도 경험했으므로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이다.41) 이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굳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설정하거나 반자본과 나란히 반신자유주의 과제를 전면에 내세울 이유가 없다. 둘째, 그런데도 굳이 신자유주의 반대를 주요 과제를 내세우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이전의 케인스주의 타협주의를 거치자는 의미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케인스주의를 거치자는 것은(현재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이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옹호하고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내에서는 불가능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는 불필요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케인스주의가 불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방파제로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방해한다. 그러면 현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그것의 실행이 가능한가? 자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케인스주의 타협으로 이른바 ‘30년 간의 황금기’(glorious thirties)를 누렸다. 그러나 그 황금기는 앞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종언을 고했다. 이윤율저하경향 법칙이 작동하고 관철된 때문이었다. 이런 축적위기를 극복하고자 고안되고 채택된 것이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였다. 모두 자본의 착취도를 높여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세계화와 결합되어 추진되었다. 이는 투자유인인 이윤율이 낮아진 데다 인구증가의 둔화로 인해 투자기회가 줄어든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도였다. 그러므로 케인스주의로 돌아가고자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포기하면 자본주의는 투자가 멈추어서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1980년에 이르러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파산하고 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트럼프든 누구든 이런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안에서는 반신자유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방책이다. 한편 사회주의로 곧장 나아가고자 하면 이 단계는 불필요하다. 케인스주의 정책을 실시해 봐야 노동대중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구 자본주의 노동대중은 복지국가를 경험했다. 그러나 복지국가임에도 출산율이 저하하고 인구가 감소했다. 그런 따위의 개량으로는 자본주의의 인간소외를 줄일 수도 감출 수도 없었던 것이다.


<5> 반(反)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한데 뭉뚱그릴 수 없다


  이런 좌파 조류의 한 사람인 이도흠 교수는 최근 ‘윤퇴진 제주행동(준)’이 주최한 ‘불평등 타파 한국사회대전환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이러한 [한국사회 6대 복합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이며,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있다” “진보진영은 이 자본주의 해체와 대안사회를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정책과 담론을 분명히 제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생태적이고 평등한 참여민주주의 커먼스 사회’,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모든 운동과 정책의 목표를 맞추어야 한다.” “노동운동은 실리주의, 조합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반자본/반신자유주의를 지향하면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가운데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42)


  이 조류에서는 십수년 전에는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을 거친 후 사회주의를 전망하더니 최근에는 반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한데 묶어서 하나의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으나 신자유주의 반대가 지니는 한계를 인식한 때문이 아닌가 추정한다. 위에서 검토했듯이 신자유주의 반대는 현실적 실천에서 정리해고·비정규직 반대로 나타나는데, 그것들이 억제된다고 해서 노동대중에게 새로운 삶이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반대, 그것은 잘 해야 현상유지이다! 방어이지 공격이 아니다. 또 김교수의 표현처럼 문제는 생산관계인데,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서 그것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생산관계에 이렇다 할 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계급역관계의 일정한 양적 변화는 수반할지라도 전진적인 방향에서 질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면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을 하나로 뭉뚱그리면 되는가? 반신자유주의는 부분적으로라도 생산관계의 질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변화이다. 반면 반자본 사회주의는 생산관계의 본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이렇게 성격과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를, 다시 말해 민주개혁과 사회주의혁명을 기계적으로 한데 묶어서 추진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현실에서 그 둘은 친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로 상충한다. 논리적으로라도 이치에 닿으려면 그 둘을 분리하여 전자를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후자를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구분하여 단계적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전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반신자유주의는 계급관계의 질적 변화가 아니므로 반신자유주의 실현을 민주혁명으로 호명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한데 뭉뚱거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론적·실천적으로 심각한 오류이다. 


3) 현 단계 혁명의 주체형성 문제


  급진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노동자·민중은 일정하게 사회주의 사회의 인간형인 ‘사회적 개인’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본주의 인간형인 사적·이기적 개인으로 머물러 있는 한 노동귀족들이 이 혁명에 소극적일 것이고 중산층이 독점재벌의 하위 파트너가 되어 이에 반대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 단계 혁명인 급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일반 대중은 쁘띠부르주아적인 평등주의 의식을 가지고 이 혁명에 동참할지라도 이 급진민주주의 혁명 단계서도 조직된 노동귀족의 일부와 중산층의 일부는 각성하여 사회적 개인으로서 이 혁명에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노동귀족층은 대기업 정규직으로서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이 혁명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노동귀족층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좌익 공산주의’ 편향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노동귀족층의 대다수가 당면 급진 민주주의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다거나 선봉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익 기회주의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레닌이 비판한 ‘좌익공산주의’에 대비한다면 ‘우익공산주의’ 편향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어느 편향이 더 문제일까? 발제자는 후자라고 단언한다.


  노동대중과 근로민중을 쁘띠부르주아적 의식 상태로부터 노동계급 의식으로, 사적 개인주의 의식으로부터 사회적 개인주의 의식으로 변혁하는 문제는 당면 급진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 혁명을 심화시키는 데서도 또 그것을 심화시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급진 민주주의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을 누그러뜨리는 사회대개혁에 머무르고 말 것이며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임무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이 혁명의 성공 이후 노동계급이 더욱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개인으로 고양되지 않는 한 이 혁명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중간단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노동자·민중이 혁명운동과 사회운동의 올바른 지도에 따라 사회적 개인으로 더 높이 고양된다면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힘차게 추진될 것이다. 이렇게 사적·이기적 개인이 사회적·이타적 개인으로 변혁되는 것은 혁명적 실천과 비판적 학습이 맞물려 진행되는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만 성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43) 


  일반 노동대중이나 노동귀족층이나 어느 부분을 대표하든 사회운동의 지도적 부분은 과거 노동운동 지도부들이 그러했듯이 이기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대의에 복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즉 전태일 동지와 같이 사회적·역사적 개인으로 자기 자신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을 의식화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의식화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이 해결되지 않고는 어떤 전략과 전술도 공염불이 될 것이다. 이런 자기 성찰과 혁신이 이루어져야 우리가 추구할 사회주의가 어떤 사회주의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현재의 세계와 한국사회 현실을 인식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런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변혁과 혁명의 이념과 전략을 수립하는 문제에서 연구와 토론을 통한 생각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오며


  윤석열 일당의 12.3 친위 군사쿠데타는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으로 일단락되었다. 천만 다행이다. 이 사태는 몇 가지 지점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첫째,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 민주주의 정치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런데도 많은 지도적 인사들은 한국이 산업화도 성공하고 민주화도 성공한 모범국가라고 자화자찬해 왔다. 산업화는 모르지만 민주화는 실패했다. 이들은 국민을 향해 사과해야 한다. 윤석열을 미치광이로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미치광이가 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국민의 책임인가, 정치권의 책임인가, 아니면 제도와 체제의 탓인가?


  둘째, 그 군사쿠데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에 극우세력이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표면에 드러났다. 태극기부대가 존재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그 세력은 광장에서 민주·진보 세력보다 더 큰 대중동원력을 보여주었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국민의 1/3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극우세력의 약진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런 극우화 경향은 세계 자본주의의 종주국으로 평가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확인되고 있고, 복지국가라고 자랑해온 유럽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이 유력하게 형성되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과감하게 도전하기 전에는 계속될 것이다.


  셋째, 이 극우세력은 그 이전에는 수구보수였다. 그런데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진보세력은 모두 이들을 ‘보수’라고 불러 왔다. 수구세력 자신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보수인 것은 맞지만 수식어 없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라는 수식어가 붙어야만 하는 ‘수구보수’ 또는 그냥 ‘수구’였다. 그렇게 수구보수 세력을 그냥 보수라고 호명함으로써 그들을 척결대상이 아니라 경쟁상대로 삼고 정치를 했다. 이를 포장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진보가 아니라 중도보수임에도 진보를 자칭했다. 위기의 순간에 진실이 드러나는데,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사법리스크가 압박해오자 민주당이 진보정당이 아니라 중도보수 정당임을 선언하고 자인했다. 이는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이 지점에 대해 민주당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수구세력과 적대적으로 공존함으로써 이 수구보수 세력으로 하여금 극우세력이 되도록 방조했다.


  넷째, 지금 이 시점에도 민주당과 친 민주당 성향의 진보세력과 사회운동 세력은 일말의 성찰과 반성을 보이지 않고 대선을 통한 집권에 집중하고 있다. 제7공화국을 건설하자면서 개헌을 뒤로 미루고 있고, 개헌을 언급하더라도 제헌은 절대 금기어로 삼고 있다. 그리고 개헌을 입에 올리더라도 혁명적인 내용(사회주의혁명은 물론 민주주의혁명 내용조차도)은 철저하게 제거되어 있다. 생각과 양심이 있는 민중은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혁명은커녕 민주주의 혁명조차 도모하지 않으면서 ‘빛의 혁명’ 운운하며 혁명이라는 단어를 오염시키고 있는 세력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 이것이 4.9인혁열사들이 산화한 지 50년이 지난 이 시각 이 땅의 노동자·민중이, 사회운동과 진보세력이 깊이 유념해야 할 지점이다.


<각주> -------------------------------------------------------------------------------------------------------------------------------------------------------------------------------------------------


1) A.G. 프랑크, 『저개발의 개발 - 제3세계의 경제와 종속이론 그리고 빈곤의 원리』, 1980. 새밭. 참조, 그의 종속이론은 식민지·종속국에서 경제가 발전할 수 없고 저개발이 지속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2) 부르주아경제학에서 ‘침체’는 일반적으로 두 분기 연속 또는 그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는 상태로 규정한다.


3) JP모건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기존 0.9%에서 0.7%로 일주일 만에 하향 조정했다. <연합뉴스>, 2025.04.08.


4) 평균치로만 봐서는 안 된다. 분배 양극화가 극심하므로 하층 노동자·민중의 소득과 소비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이와 관련, <연합뉴스>, 2025.03.31., ‘대기업 절반 이상 ’억대 연봉‘ 준다 ... 5년 전 대비 6.1배 많아져’ 참조. 대중소기업 격차가 더 커졌다고 보도했다. 이는 수년간의 고물가로 대기업 임금이 계속 상향됐지만 중소기업 임금 상승폭은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5) ‘“이러다 한국 진짜 망한다.” OECD 경고 ... 왜?’, <세계일보>, 2025.03.04.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월 5일(현지시간)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실태와 대응방안을 담은 책자를 발간했다. 한국의 출산율이 다른 경제발전 국가보다 크게 낮은 이유로 높은 사교육비 지출과 주택비용 상승을 꼽았다. 여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일자리 격차, 임금격차 등 노동시장 양극화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2021년 한국의 종사자 250명 이상 기업 일자리 비중은 13.9%에 불과하다. 같은 해 OECD 평균은 32.2%다. 


6) 한국 자본주의는 최근 일본을 따라잡는 약진을 보인 이후 서서히 퇴조 양상을 보이고 있다. 머지않아 일본을 따라서 쇠퇴할 것이다. 퇴조는 성장률이 낮은 가운데 낮아지는 상태를 말하고, 쇠퇴는 제로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이 노멀(normal)인 상태를 말한다. 발제자의 용어법이다. 


7) 그는 2014년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와의 대담에서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가장 잘 실현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라고 본다” “이제 이념적으로 NL도 PD도 버리고 사민주의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민노련 시절의 혁명적 사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했음을 분명히 했다. 조현연,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프레시안>, 2021.11.05. 


8) 박찬식, 「마르크스와 <자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참세상>, 2012.09.18.,


9)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역) 「서문」에서 역사유물의 관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 내부에서 발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생산제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멸망하지 않으며, 새로운 보다 높은 생산제관계는 그들의 물적 존재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이전의 것을] 대신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류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과업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업 자체가 그 해결의 물적 조건이 이미 주어져 있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과정에 처해 있는 곳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강신준은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을 성숙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2012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자본을 읽다’에서 자본주의가 성숙하고 긴 기간 동안 개혁해야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물적 조건이 성숙해 있는 곳뿐만 아니라 생성과정에 처해 있는 경우에도 과업 자체는 출현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도 출현하지 않을 수 없다.


10) 『자본론』 1권(김수행 역) 제1장 제4절에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다양한 개인들의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 표현하였고, 불어판에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표현 대신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연합(réunion d'hommes libres travaillant avec ...)이라고 표현했다. 


11) 『자본론』 1권 33장 「근대적 식민이론」 주석에서 일정한 사회적 관계 하에서만 금이 화폐가 되고 사탕이 가격을 가진 상품이 됨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 이때 사회적 관계란 교환관계인가 생산관계인가? 상품교환 관계는 상품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즉 상품 생산관계의 현상형태이고 표현양식이다. 교환가치는 가치의 현상형태이고 표현양식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 더불어 상품관계가 자본주의의 기본적 두 생산관계이다.


12) 정일용, 「원조 경제의 전개」 및 이대근, 「차관경제의 전개』 (『한국자본주의론』, 이대근·정운영 편, 1984) 및 정일용, 「6.25동란 후 미국 원조의 성격과 그 귀결」, 참조.


13) 함종호, 「인혁운동의 민족민주변혁과 그 계승」 참조.


14) 1980년대 사구체논쟁 당시 안병직과 그의 제자들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폈다. 장시원, 「식민지반봉건사회론」(『한국자본주의론』, 이대근·정운영 편, 1984)을 보세요. 안병직은 지금 뉴라이트의 사상적 지도자가 돼 있다.  


15) 범민련 전 사무처장으로 지금 뉴라이트 기수가 돼 있는 <민경우의 ‘소통과 논쟁 토론방>에서 민경우의 식민지반자본주의론 비판에 대해 단비라는 닉네임의 토론자가 다음과 같은 반비판을 했다.(2008.02.25.) “한국사회의 식민지성과 반신불구의 반자본주의 성격 규정은 일정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며, 재구성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민경우님은 사회경제적 쟁점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궁극에 가서는 사회성격에 대한 현대적 재구성으로 담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회성격을 구할 때 가장 주되는 규정력은 정치적 관계, 그 중에서도 국가주권을 누가 틀어쥐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경우님이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사회성격의 재구성으로 이끌려 한다면 무엇보다 국가주권에 대한 변화를 논증해야 합니다. 이것을 논증함이 없이 이러저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놓고 사회성격의 변화를 논하는 것은 비본질적 문제를 본질적 문제로 대체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이해하려면, 김장호,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 1990. 을 보세요. 


16) 민족문제연구소 영상물 『백년전쟁』, 박정희 편을 보시오.


17) 김종현, 『산업혁명과 기업가 활동』(其1), Ⅲ. 「산업혁명기의 기업가유형」, 1972.


18) 박형준,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자본』, 2013.


19) ‘3050 클럽’은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인 국가들의 집합을 뜻하는 경제 용어이다. 경제 규모와 소득 수준을 모두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선진국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 클럽에 속한 나라는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이탈리아, 한국 일곱 나라뿐이다.


20)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한국 네 나라다. 윤석열은 2022, 2023, 2024 3년 연속 이 회의에 참석했다.


21) 반자본주의론은 이상적인 자본주의 모형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어긋나기 때문에 온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반자본주의론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고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에서 말하는 자립경제와 유사하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통합되지 않은 자립적 경제, 각 산업이 균형을 이루는 경제, 분배가 비교적 평등한 경제 등이다. 생산의 세계화가 진행된 오늘날 이런 경제가 성립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런 모형에 맞지 않으면 온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반쯤 자본주의라는 규정은 목적론적이다. 자본주의 여부는 생산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즉 생산이 얼마나 상품생산과 자본생산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22) 반자본주의론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성에 대한 인식을 희미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운동을 개량화한다. 미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해 과장하면서 우리 자신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일을 회피하게 한다.


23) 사회운동 일각에서 재벌에 대해 ‘재벌체제 해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1997년 민주노동당 강령 제정 당시에 자칭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송태경이 ‘재벌해체’를 대신해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재명도 2017년 대선에서 ‘재벌체제 해체’라는 말을 사용했다. 친 재벌 세력이 “재벌을 없애겠다는 것이냐”고 압박하자 재벌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재벌체제를 없애자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재벌체제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밝히지 않았는데, 족벌에 의한 재벌의 소유와 경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재벌체제 해체는 이 총수일가의 족벌경영을 전문경영인 경영으로 넘기라는 것으로, 문어발식으로 확장된 기업집단은 유지하는 것으로 읽힌다. 재벌해체는 족벌 소유·경영과 문어발식으로 확장된 기업집단 두 가지 모두를 해체하는 것을 뜻한다. 이재명은 2022년 대선에서는 재벌체제 해체조자 거둬들이고 재벌규제를 내세웠는데, 12.3 쿠데타 정국에서는 그런 재벌규제조차 거둬들였다.  


24) 이종보,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 2010, 한울.


25)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012, 폴리티쿠스와 김당,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 2017, 메디치미디어 등을 참조.


26)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는 최근 발표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선거민주주의로 강등시켰다. 그 아래 등급은 선거 독재체제이고 마지막 최하 등급은 폐쇄된 독재체제이다. 선거민주주의란 선거와 기본적 자유만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27)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단계론을 비판했다. 그가 비판한 것은 경제주의자들이 노동대중의 의식이 경제투쟁을 거쳐서만 정치투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제적 고통에 대한 의식과 경제투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소아기적 노동운동가들은 이 말을 민주주의 혁명 단계 없이 곧장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곡해했다.


28) 이들은 구로동맹파업 이후 서노련(서울노동자연합)을 만들었고 이어 인노련(인천노동자연합)을 만들어 전국조직을 결성하려 했다. 그 지도자들은 지금 유명한 정치인이 되어 있다.


29)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전반의 전투적 경제주의에 미치지 못한다.


30) 민주노총의 정치강령은 자주·민주·통일이다. 반면 전노협의 정치강령은 민주·자주·통일이다. 전자는 민족적 과제가 전략적이며, 후자에서는 계급적 과제가 전략적이다.


31) <통일뉴스>, 20222.06.26. ‘7월 23일 조국통일촉진대회에 함께 합시다!’에서 범민련 원진욱 사무처장은 “자주 없이 민생 없고, 반미 없이 생존권 없다”고 주장했다. 


32)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2002, 김세균,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운동」, 2001. 등을 참조. 김세균 교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구분했다. 그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두고 한 말이고, 실질적 민주주의는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직선제를 실시하여 자유주의 분파에게 권력에 접근할 자유를 주면서 노동자·민중은 권력에서 배제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 말고도 실질적 민주주의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치적 영역에 대한 민주주의 문제로 구분하는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실질적이냐 형식적이냐 하는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도 따져져야 하고 사회경제적 영역에서도 따져져야 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형식적으로는 자유롭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부자유롭다!


33) 이 시기에 중남미를 비롯하여 군사파쇼 통치를 실시해 왔던 미제의 여러 식민지·종속국들에서 연이어 이런 예방혁명이 이루어졌다. 이웃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군사독재를 붕괴시킨 1986년 민중항쟁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도 한국처럼 노란색을 상징으로 했다.


34) 당시 주한 미 상공회의소(암참)와 IMF는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한국재벌의 도덕적 해이를 지목하여 집중 비판하며 재벌해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외국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와 주식시장 진출을 개방하자 그들의 재벌해체 요구는 쑥 들어갔다. 이때 한국의 진보운동 일각에서는 차제에 이들의 힘을 빌려 재벌을 해체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35) 한국의 현행 노동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일제의 치안경찰법적 악법임을 상세하게 알려면 조경배, 「한국의 쟁의행위와 책임」, 2014, ‘한국노동법학회 국제학술대회’를 참조.


36) 마오쩌둥, 「모순론」(1937), 「신민주주의론」(1940) 참조 거기에서 그는 하나의 과정 안에 여러 단계가 있음을 논증하고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을 단순한 양적 변화가 아니라 부분적 질적인 변화라고 설명한다. 마오는 이 신민주주의를 구 삼민주의가 친 자본 성격을 가졌던 데 비해 반 자본 성격을 지닌 삼민주의라고 설명했다.


37) <레디앙>, 2012.11. 22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 필요’ 115명 지식인 김소연 후보 지지” 참조.


38) 김세균 외 8인, 2013, 『사상이 필요하다』, 중 김세균 교수 강의 6강 한국 진보정치의 회생을 위한 제언 참조.


39) “손호철의 97체제론은 경제주의적 편향”. <레디앙>, 2009.09.30., 조희연 등의 이 비판은 일면 타당하지만 노동자적·민중적 시각이 아니라 국민적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40) 프랑스와 셰네 편, 『금융의 세계화』로 한국에 알려졌다. 한국에서 이런 조류를 대표하는 케인스주의 학자는 한밭대 조복현 교수다. 「금융주도 축적체제 형성과 금융자본의 지배」, 2004, 『사회경제평론』 제23호 참조. 그는 자주 <한겨레>에 기고한다.


41) 계급관계가 자본이 일방적인 미국과 일본은 다를 수 있다.


42) <노동과 세계>, 2024.01.16., 「불평등 체제를 두고 볼 것인가? ... 2024년 한국사회 대전환의 과제는?」 참조.


43) 이와 관련해서는 체 게바라의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1965, 미 번역)와 이스트번 메자로스, 『21세기 사회주의』(한울, 2012), 「8. 교육; 사회주의 의식의 지속적인 발전」을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