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 노동·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3) : 이념
김승호(헬조선변혁 전국추진위 지도위원)
(2024년 1월 28일 정세강연 원고)
4. 이념(이 글은 금년 1월 행한 ‘격변기 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강연의 원고 중에서 ‘이념’에 관한 부분입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의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특히 자본주의 쇠퇴와 사멸 시대의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장착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세계관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21세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사회주의면 사회주의지 무슨 21세기 사회주의인기? 21세기론의 유행을 따르는 상업적 이론이 아닌가? 필자도 21세기론을 부정했다. 그런데 21세기 사회주의론은 그런 상업적 이유에서 제출된 이념이 아니다. 세계 혁명가 체 게바라가 구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환대를 받으면서 듣고 본 소련 현실을 비판하면서 내놓은 이념이다. 그는 소련은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므로 실패하고 있고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고 통찰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는 참다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가들은 소련이 붕괴하자 ‘전망’을 상실하고 배신하고 도주했지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소련 사회주의의 실패를 확신하고 실패 이후에 성찰로 등장할 새로운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게 먹물 사회주의자들과 목숨을 걸고 몸을 던진 혁명가 체 게바라의 차이이다. 그러하기에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21세기 사회주의론의 핵심은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정립했듯이 환경과 인간활동, 인간성의 변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동시변혁은 또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박애주의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처럼 노동자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면 좋은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 그런 사회에서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누군가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즉 또 하나의 지배계급을 불러낸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환경의 변혁과 인간활동의 변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은 혁명적 실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갈파했다. 체 게바라의 21세기 사회주의 사상은 이런 마르크스의 통찰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체 게바라의 사상을 채용한 쿠바에서는 환경 즉 사회체제의 변혁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인간의 변혁 즉 사회주의적 인간의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게 소련 붕괴 이후에도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과 달리 쿠바 사회주의가 붕괴하지 않은 핵심적 이유다.
그러면 사회주의적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자본주의에서 형성된 인간을 계승하면서 부정하는 인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해방시켰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 개인은 이기적이고 욕망추구적인 인간이다. 특히 물질적 욕망을! 사회주의적 인간은 전태일 동지가 역설했듯이 물질적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인간이며 동시에 사적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이익 즉 사회적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은 매우 윤리적 도덕적인 동시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만인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능력의 내용과 사용은 자본주의의 그것과 180도 다르다. 자본주의 식이 아니라 사회주의 식이다. 쿠바의 의사와 한국의 의사를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다. 쿠바 의료는 예방이 중심이다. 한국 의료는 수술이 중심이다. 쿠바 의사는 인술을 편다. 한국 의사는 상술을 편다. (이 글을 쓴 것은 한국에서 의사들의 사보타주로 의료대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다.)
이런 사회주의적 인간이 형성되려면 사회의 환경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구상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따로 있고, 그것에 복종하는 자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인간 사이에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군대식으로 보자면 계급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상품적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교환되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이 상품으로 교환되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은 이상적인 사회이다. 그렇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주의를 핑계로 사회개량주의에 머무르면 자본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다. 현실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다들 극우의 집권을 우려하고 있고 중동전쟁과 제3차 세계대전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자만 되어서는 안 된다. 체 게바라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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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위의 글에 관련한 연구 노트입니다.
(2023년 8월말에 작성하고 2024년 8월말에 퇴고했습니다.)
엥겔스의 사회주의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반뒤링론에 대하여
반뒤링론(오이켄 뒤링 씨의 과학변혁) Ⅷ 변증법. 부정의 부정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1).
위에서 약술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16세기 이래로 이루어져 온 개인적 소유의 지양이 제1의 부정이다. 이에 뒤이은 제2의 부정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개인적 소유’의 부활이되 토지와 노동수단에 대한 공동보유에 기초한 보다 높은 형태의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맑스씨는 이 새로운 ‘개인적 소유’를 동시에 ‘사회적 소유’라고 불렀는데, 요컨대 바로 여기서 헤겔이 모순을 지양한다고 한, 즉 말장난에 따르면 극복하는 동시에 보존한다는 고차적 통일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맑스 씨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라는 몽롱한 세계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교의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이 심오한 변증법적 수수께끼를 풀도록 맡겨두고 있다. ... 이상은 뒤링 씨의 말이다.(145~146쪽)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것은 개인적 소유를 복원시키되,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기초로 하여, 즉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협업과 토지를 비롯한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 소유 등을 기초로 하여 복원시킨다. 자기 노동에 기초한 분산된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것은, 사실상 이미 사회적인 생산 경영에 기초하고 있는 사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험하고 더 어려운 과정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요컨대, 몰수자에 대한 몰수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는 토지에 대한 사회적 소유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의 복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소유에 들어가는 것은 생산물, 따라서 소비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 살 먹은 어린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맑스는 56면에서 “공동체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며 자신들의 많은 개인적 노동력들을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 따라서 사회주의적으로 조직된 연합체를 상정하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한 부분은 다시 생산수단으로 쓰인다. 이 부분은 계속 사회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 부분은 연합체 성원들이 생활수단으로 소비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뒤링 씨의 헤겔화된 머리도 이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146~147쪽)
그러면 맑스에게 있어서 부정의 부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맑스는 791면과 그 이하에서 그 앞의 오십 면에 걸쳐 서술한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연구의 결론을 총괄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적어도 영국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소경영이 존재하였다.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요체는, 이 나라에서는 이 직접적 생산자들에 대한 수탈, 즉 자기 노동에 근거한 사적 소유의 해체에 있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상술한 소경영이 오로지 생산 및 사회의 협소하고 자연성장적인 한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그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세상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 즉 개인적이고 분산된 생산수단의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 수단으로의 전화가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들로 전화하고 그들의 노동조건들이 자본으로 전화하자마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자마자, 노동의 그 이상의 사회화와 토지 및 그 밖의 생산수단의 그 이상의 전환, 따라서 사적 소유자들에 대한 그 이상의 수탈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이제 수탈당할 자는 더 이상 자영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들의 작용에 의해서, 즉 자본들의 집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들을 때려죽인다. 이러한 집적, 즉 소수 자본가들에 의한 다수 자본가들의 수탈에 병행하여 노동 과정의 협업적 형태가 더욱 대규모로 발전하며,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응용, 토지의 계획적인 공동 경작,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으로서 사용함으로써 얻는 모든 생산 수단의 절약 등이 발전한다. 이 전화 과정의 모든 이익을 강탈하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듦과 동시에 빈곤, 억압, 예속, 타락, 착취의 양이 증대하지만, 또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팽창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 자체의 기구에 의해 훈련되고 단결되고 조직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증대한다. 자본은, 이 자본과 함께 그리고 이 자본 밑에서 개화해 온 생산방식의 족쇄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의 사회화는, 그것들의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2)(148~149쪽)
맑스는 자신의 역사적-경제학적 증명을 끝낸 다음에, 아제 비로소 다음과 같은 서술을 이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전유 방식,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적인 사적 소유, 즉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정은 자연적 과정의 필연성을 갖고서 그 자신에 의해 생산된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등등 (이하는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다)
따라서 맑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이 과정이 일부는 이미 실제로 일어났고 일부는 이제 틀림없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여기에 덧붙여 이 과정을 일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뒤링 씨가 부정과 부정이 여기서 과거의 태내에서 미래를 분만시키는 산파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거나 맑스는 사람들이 부정의 부정을 신용하여 토지 및 자본 공유제(이것 자체가 뒤링 류의 형체를 갖춘 모순이다)의 필연성을 납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시 뒤링 씨의 순전한 날조이다.(150쪽)
역사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모든 문화 민족은 토지에 대한 공동 소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정한 본원적 단계를 넘어선 모든 민족에게 있어서 토지에 대한 이러한 공동 소유는 농경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생산에 대한 족쇄로 변한다. 그것은 지양되고 부정되며, 짧거나 긴 중간 단계를 거친 후에 사적 소유로 전화한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에 의해 농경이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반대로 사적 소유가 생산에 대한 족쇄로 된다. -- 오늘날, 소토지 보유나 대토지 보유를 막론하고 모두 이러한 사정에 있다. 이것 또한 부정하라는, 그것을 다시 공동재산으로 전화하라는 요구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옛날의 본원적 공동 소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고차적이고 발전된 공동 보유의 형태의 확립을 의미하는바, 이러한 고차적 공동 보유 형태는 생산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비로소 생산을 그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현대의 화학적 발견들과 기계적 발명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 한다.(154쪽)
이상의 『반뒤링론』에서 인용한 문구들에서 엥겔스는 사회주의 생산양식 하에서의 소유형태에 대해 생산수단은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소비수단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라졌던 개인적 소유가 회복된다고 말한 것은 이 소비수단의 개인적 소유의 회복을 두고 한 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 또는 주장은 요령부득이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말은 소상품생산에 존재하던 개인적 소유가 자본주의 생산에서 부정되었다가 사회주의 생산에서 다시 복원된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사적 소유는 재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원되는 개인적 소유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활수단/소비수단의 개인적 소유라고 한다면 그러한 생활수단의 개인적 소유는 소상품생산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도 부정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생활수단 가운데 일부는 사치적 소비를 위해 자본가계급이 소유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소상품생산에서의 생산자의 생활수단 소유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의 임금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로의 이행을 개인적 소유의 부정이라고 규정하고 또 자본주의 생산에서의 임금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에서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를 부정된 것의 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겠는가? 어느 생산양식에서나 생활수단은 최종적으로는 직접 생산자들이 소유했다. 다만 생산된 생활수단의 일부를 지배계급에게 착취당했으며, 그 착취의 방식과 크기가 달랐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생산양식이 바뀜에 따라 부정되었다가 다시 부정되는 것은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생활수단의 소유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구별이다. 마르크스는 소생산자의 소유를 개인적 사적 소유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사적(private) 소유와 개인적(individual) 소유는 서로 다른 성격의 사물임이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또 소상품생산자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또는 자본가적 사적 소유를 분명히 구별했다. 두 경우 모두 사적 소유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소생산자의 경우에는 개인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자본가적 소유에는 그것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본가적 소유에서는 사적 소유는 계승되지만 개인적 소유는 부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정된 “개인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수수께끼의 열쇠다.
엥겔스의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독립 소생산제 이전에는 부족이라든가 국가라든가 하는 집단체(collective)가 토지를 소유했다. 그런 생산양식 아래서는 개인(Individual)은 집단 또는 공동체에 매몰되어 부존재했고 발언권이 없었다. “개인”은 근대의 산물인 것이다. 근대가 시작될 당시 개인은 공동체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이 독립적 존재임을 주장할 수 없었고, 공동체를 해체하고 사적(private)인 생산자로 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독립적 존재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소생산자를 그 이전의 소생산자와 달리 “독립” 소생산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토지를 비롯하여 생산에 필요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었고(freeholder), 또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 생산물을 자기의소유물로 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려면 인격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지점에서 독립 소생자자들은 생산과정에서 타인에 예속되지 않은 주인된 존재였다.
이런 상태는 수백 년에 걸친 지주·자본가계급의 원시축적(또는 본원적 축적)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로써 인격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출현했다. 지배계급은 이 프롤레타리아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하여 생산을 담당하도록 강제했다. 경제외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적 강제! 이런 자본가적 소유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사적인 개인 즉 자본가가 소유하지만 그는 여러 명의 타인을 고용하여 생산하고 끊임없이 이러한 소유관계 즉 자본가의 생산수단 독점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이 자본가적 생산에서는 직접생산자들 개개인은 생산과정과 생산물에 대한 결정권과 처분권이 없다. 그는 생산물 가운데 일부인 임금재를 생활수단으로 분배받아 소유하고 소비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유로운 노예, 임금노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적 소유는 철저하게 부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된 개인적 소유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에서는 복원된다. 그러나 개인적 소유는 소생산제에서와 같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됨으로써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자 또는 보유자가 되는 것을 통해서 개인적 소유자가 된다. 전근대 시대의 집단적 소유에서는 개인적 소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개인이 탄생했으나 이 개인은 자본주의하에서 사실상 부정되었다가 자본주의 하에서 발전한 집단적 생산방식을 기초로 공동소유를 창출함으로써 집단적 소유자인 동시에 개인적 소유자로 부활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소유는 바로 이 공동소유 즉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인 소유를 말한다. 이 소유형태에서는 전근대에서의 총유와 같이 개인의 독립적 존재성이 부정되지 않는다. 집단체 소유가 아니라 개인들의 연합이 소유한다. 이 연합은 또한 개인의 독립성만 인정하고 집단체는 부정하는 사적 개인들의 연합이 아니다. 그런 연합은 결국 해체된다. 그렇게 해체되지 않으려면 이 연합은 사회적 개인들의 공고한 연합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연합을 그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만 파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며, 합의된 계획에 따라 자신들의 수많은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3)이라고 설명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불어판에서 용어를 다소 다듬었다. 독어판에서 독립 소생산자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집체(단)적 소유의 대립물”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집체(단)적 소유의 대립물”이라고 고쳤다. 독립 소생산자들이 일반화된 소상품생산 사회 이전에는 사회적 소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실상 사회적 성격을 띠는 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시간, 노력, 고통”에서 “사회적 성격을 띠는 생산”을 “집단적 생산방식”으로 바꾸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을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력의 측면에서 사회적 성격은 높아지지만 생산관계에서 노동자들 개인의 소유는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수정했을 것이다.
한편, 독어판 및 영어판에서는 “개인적 사적소유”(individual private property)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하고 있고 또 “개인들의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둔 분산된 사적 소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한편 불어판에서는 “{생산수단/필자} 점유자 자신의 노동에 기반한 소유” “자주독립적이고 개인적인(indépendant et individuelle) 노동의 필연적 귀결인 그 사적 소유“ ”개인적 노동의 대상인 사적이고 분산된 소유“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개인적“이라 함은 노동이 타인에게 속하지 않고 노동자 자신의 것인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소유 문제는 생활수단의 소유문제가 아니라 생산수단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소유 문제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되려면 당연히 그가 사용하는 생산수단(노동대상과 노동수단) 역시 노동자 자신의 소유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상품생산에서는 분산된 사적 소유와 동시에 개인적 소유가 성립한다. 이 개인적 소유는 사회주의에서 노동이 집단적·개인적 노동이 되는 것과 나란히 생산수단의 사회적(집단적·개인적) 소유를 통해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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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농노제) ⇨ 소생산(과도기) ⇨ 자본제 ⇨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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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 집중(주로 토지) 분산(주로 토지) 집중(주로 생산된 생산수단) 집중(좌와 동일)
노동 타인(예속)노동 개인적·독립적 노동 타인(예속)노동 개인들의 공동 노동
소유 집체(단)적, 공적 사적·개인적 사적·자본가적 사회적, 집체(단)적·개인적
2.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4)
서설[영어판 (1892년)]
“이 저술은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 유물론이라는 단어는 영국의 꽤 많은 독자들의 귀에 몹시 거슬릴 것이다. ‘불가지론’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유물론은 --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칠 세기부터의 모든 현대 유물론의 고향은 바로 --영국이다.”(410쪽)
“그래서 나는 바란다. 내가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궁극적 원인과 결정적 추동력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생산 및 교환 방식의 변화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의 서로 다른 계급들로의 분열과 이 계급들의 투쟁에 있다고 보는 세계사의 진행에 대한 특정한 파악을 지칭하기 위해, 다른 여러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어로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독일어로는 속물들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덕망 있는 양반들“이라 해도 그렇게 놀라 자빠지지 않았으면 하고.”
“새로운 출발점은 대두하는 부르주아지와 과거의 봉건적 토지보유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이었다. ... 영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옛날의 봉건 남작들은 장미 전쟁에서 서로를 때려 죽였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비록 그 대부분이 오래된 가문의 후손들이었지만, 훨씬 먼 방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의 관습과 성향은 봉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들은 화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곧바로 면양으로 수 많은 소작인들을 몰아냄으로써 지대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교회 영지를 그냥 나눠주거나 헐값에 판매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지주들을 대규모로 창출했다; 십칠 세기 말까지 끊임없이 게속된 대규모 영지들의 몰수도, 그 후에 영지들이 졸부들 및 반 졸부들에게 분배됨으로써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헨리 7세 이래의 영국의 ‘귀족’은 공업 생산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로부터 편익을 챙기려 들었다,”(421쪽)
“그리고 이제 대륙 부르주아의 자유사상과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영국의 덕망 있는 속물근성의 승리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반역적이게 되었다. 그들은 완전히 사회주의에 전염되었고, 게다가 자기들이 지배권을 전취하는 수단의 합법성에는 매우 정당하게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 튼튼한 자들은 여기서 실제로 나날이 점점 더 심술궂게 되어 갔다.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들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남아 있던 길은 ... 자기들의 자유사상을 암암리에 잠재워버리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종교를 비웃던 자들이 ... 겉으로는 믿음이 깊은 체 하면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과 의식을 존중하며 말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직접 그러한 것을 따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유물론과 함께 궁지에 빠졌다. ”종교는 인민에게 유지되어야 한다“ -- 이것이 사회를 전반적 몰락에서 구할 마지막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들 자신에게 불행한 점은, 그들이 종교를 영원히 파멸시키려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이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의 부르주아가 냉소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외칠 차례가 된 순간이 닥쳐왔다: 이 바보들아, 난 그런 것쯤은 벌써 이백 년 전부터 너희들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단 말야!” “하지만 영국의 부르주아의 종교적 완고함도, 대륙의 부르주아의 징 치고 막 내린 다음의 개종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물결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전통은 하나의 거대한 제동력이며, 역사의 타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수동적일 뿐이므로 압도되어야 한다. 또한 종교는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방벽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법률적, 철학적 및 종교적 표상들이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들의 가까운 또는 먼 후예라면, 경제적 관계들이 근본적으로 변한 후에도 이러한 표상들이 오랫동안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와해되고 있는 사회는 어떤 종교적 설교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할 것이다.”(431쪽)
“그리고 사실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온갖 종류의 전통에 속박되어 있다. 부르주아적 전통들 --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두 정당만 존재할 수 있다든지, 노동자계급은 위대한 자유당을 매개로 하여 속죄받아야 한다든지 하는 널리 퍼져 있는 미신들. 그리고 독자적 행동을 취하려는 최초의 실험적 시도들의 시대에서부터 물려받은 노동자적 전통들 -- 수많은 오랜 노동조합들에서는 정규적인 견습 기간을 마치지 않은 모든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것; 이것은 조합들 안에 자기 자신의 파업 파괴자들을 키우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전통들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전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브렌타노 교수 같은 양반까지도 자기의 강단 사회주의자 형제들에게 유감을 표시하며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에서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서는 망설이고 저기서는 별반 성과가 없을 수도 있는 실험적 시도를 행하면서 천천히 정연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불신하면서도 그 사태는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으며, 운동은 차례로 노동자층을 사로잡고 있다. 이제 운동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죽음 같은 잠에서 깨우고 있는바, 이 새로운 세력이 어떤 값진 자극을 되돌려 주었는가 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이다.”(431~432쪽)
Ⅰ. 공상적 사회주의
“현대 사회주의는 내용으로 보면 무엇보다 먼저,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유산자와 무산자,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계급대립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에서 지배적인 무정부 상태를 목도한 산물이다. 그러나 그 이론의 형식을 보면 현대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18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세워놓은 원칙들의 계속적인 진행, 이른바 더 일관된 진행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이론마다 그랬듯이, 현대 사회주의는 물질적인 경제적 사실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기존의 사상 재료를 실마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는 혁명을 위해 프랑스에서 사람들을 계몽한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극히 혁명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외적 권위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 자연관, 사회, 국가 질서 등의 모든 것이 가차 없이 비판에 던져졌다; 모든 것이 이성의 재판정 앞에서 자기의 생존의 정당성을 변호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생존을 포기해야 했다. 사유하는 지성이 유일의 척도로서 모든 것에 갖다 대어졌다. 이 시대는 헤겔이 말한 것처럼 세계가 머리로 서 있던 시대였던바, 처음에는 인간의 머리와 그 머리의 사유에 의해 발견된 명제들이 자신을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회화의 기초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다.”(433~434쪽)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의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평등은 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 - 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성 국가, 즉 루쏘의 사회계약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태어났고 또 그런 것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18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그들의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시대가 그들에게 그어 놓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그 밖의 모든 사회의 대표자로서 등장하게 된 시민 층 사이의 대립과 나란히 착취자와 피 착취자 사이의, 부유한 게으름뱅이와 노동하는 빈민들 사이의 일반적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특수한 계급의 대표자가 아니라 고통 받는 인류 전체의 대표자라고 사칭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 층이 귀족과의 투쟁에서 그 시대의 다양한 근로 계급들의 이익을 동시에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대규모의 시민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근로계급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던바, 근로계급들은 그 발전 정도를 불문하고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 후 세 사람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나타났다.” (434쪽)
“(생시몽, 푸리에, 오언) 이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적으로 산출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시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려 했다.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성과 영원한 정의의 왕국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과 계몽주의자들의 왕국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부르주아 세계도 비이성적이고 부정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봉건주의나 그 이전의 모든 사회 상태들과 마찬가지로 쓰레기 통 속으로 던져졌다.”(436쪽)
“생시몽은 이미 자신의 주네브 편지들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내놓았다. ‘모든 인간은 노동할지어다’” “프랑스 혁명을 단지 귀족과 시민 층 사이의 계급투쟁으로뿐만 아니라 귀족 및 시민 층과 무산자들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1802년으로서는 극히 천재적인 발견이었다. 1816년에는 그는 정치학을 생산에 관한 과학이라고 언명하였고, 정치학이 경제학에 완전히 동화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경제적 상황이 정치적 장치들의 토대라는 인식이 여기서는 아직 맹아적으로만 나타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정치적 통치가 사물들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휘로 옮겨간다는 생각, 따라서 요즈음 소란스럽게 퍼져 있는 ‘국가의 폐지’에 관한 생각은 여기에서 이미 명백하게 언명되어 있다.”(440쪽)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제사상을 제외한 후대 사회주의자들의 거의 모든 사상의 맹아 형태로 포함하게 하는 천재적이라 할 만큼 넓은 시야를 생시몽에게서 발견한다면, 푸리에에게서는 현존하는 사회상태에 대한 참으로 프랑스인답게 재기가 넘치지만 통찰의 깊이를 잃지 않는 비판을 보게 된다. ... 푸리에는 비판가일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쾌활한 그의 성격은 그를 풍자가로, 그것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풍자가의 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혁명의 쇠퇴와 함께 횡행하던 사기적 투기와 당시 프랑스 상업의 일반적인 소상인 근성을 노련하고 유쾌하게 묘사한다. 이성관계의 부르주아적 형상과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한층 능숙한 것이다.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여성해방의 정도가 전반적 해방의 척도라는 것은 그가 처음 언명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지적한다. 문명은 하나의 ”악순환“ 속에서, 즉 그 자신이 부단히 새로이 산출하면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모순들 속에서 운동하여, 진심으로건 거짓으로건 그 자신이 원래 도달하려 하던 것의 대립물에 부단히 도달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문명에서 빈궁은 여분 자체에서 생겨난다.’(441쪽)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은 한편으로는 타고난 체질의 생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생 동안, 특히 성장기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생산물이라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자들의 학설을 자기의 것으로 하였다. ... 그는 산업혁명에서 자신이 동경해 온 명제들을 적용함으로써 혼동 속에 질서를 불어넣을 기회를 보았다. 그는 이미 맨체스터에서 한 공장의 오백 명의 노동자들의 지배인으로서 그러한 일을 성공적으로 시도한 적이 있는바,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 겸 사원으로서 스코틀랜드 뉴 라나크의 거대한 방적공장을 같은 정신으로 지휘하였는데, 다만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행동하였고 그리하여 유럽에 명성이 자자해질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점차 불어나서 2,500명을 헤아리게 된 인구는 원래는 극히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는 이곳을 완전히 모범 이민지로 변모시켜서, 폭음, 경찰, 형사 재판관, 소송, 구빈 제도, 자선의 필요 따위는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사람들을 한층 인간의 존엄에 어울리는 환경으로 옮겨놓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주의깊게 교육하도록 한 것을 통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그는 유아원의 창안자였던바, 이곳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아이들은 두 살이 되면서부터 유아원에 가게 되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거기에서 잘 보냈던지 다시 집으로 데려가기 어려울 정도였다.”(443쪽)
“그러나 오언은 이 모든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창출해 준 생존은, 그의 눈에는 인간의 존엄에 어울리는 것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그들에게 선사한 비교적 좋은 환경은, 아직 자유로운 생활 활동을 허락하는 것은 고사하고 성격과 지성의 전면적이고 합리적인 발전을 허락하기에도 몹시 미흡하였다.”(443쪽)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는 오언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한 박애주의자로서 행동하는 동안에는, 그는 부와 갈채와 명예와 명성만을 얻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신분이 같은 사람들뿐 아니라 정치가들과 군주들도 그의 말에 호의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갖고 등장하자 국면은 일변하였다. 사회개혁으로 가는 길을 다른 어떤 것보다 봉쇄하고 있다고 그에게 보여지는 세 개의 거대한 장애가 있었다: 사적 소유, 종교, 현재의 결혼 형태. 이것들을 공격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공식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파문, 사회적 지위 전체의 상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에 개의치 않고 가차 없이 공격해 나갔으며, 그리고 그가 예견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공식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였고, 언론으로부터 묵살 당하였고, 재산 전체를 바친 아메리카에서의 공산주의적 시도들이 실패하는 바람에 알거지가 되어 버렸으며, 그는 직접 노동자계급에게로 방향을 돌려 그들 가운데서 삼십년 동안 더 활동하였다.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사회운동들과 현실적인 진보들은 모두 오언의 이름과 닿아 있다. 예컨대 그는 1819년에 5년5)의 노력 끝에 공장에서의 부인 노동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예컨대 그는 영국 전체의 노동조합들이 단일한 거대 노동조합으로 통일되는 첫 대회에서 의장을 맡았다. 예컨대 그는 완전한 공산주의적 장치로 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들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도입하였다. 한편으로는 협동조합(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이 그것인데, 이는 적어도 그때 이래로 상인도 공장주도 전혀 불필요한 인물들이라는 실제적 증거를 제공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시장, 즉 노동시간을 단위로 하여 형성된 노동지폐를 매개로 하는 노동 생산물 교환기관이 그것이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 기관은 그러나 훨씬 이후에 나타나는 프루동의 교환은행을 완전하게 미리 실행한 것이었으며, 바로 모든 사회적 악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단지 훨씬 근본적인 사회개조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한 것으로서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구별되었다.”(445쪽)
“유토피아주의자들의 고찰 방식은 19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의 표상을 오랫동안 지배했고, 일부는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 사회주의는 그들 모두에게 있어 절대적 진리, 이성, 정의의 표현이며, 발견하기만 하면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역사적 발전과 무관하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다. 게다가 이 절대적 진리, 이성, 정의는 유토피아 창시자마다 서로 다르다; 이 특수한 종류의 절대적 진리, 이성, 정의는 또한 유파 창시자마다의 주관적 이해력, 그 생활 조건, 그 지식과 사고 훈련의 정도에 의해 제약되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들의 이와 같은 충돌은 그 진리들이 서로 부딪쳐서 닳지 않고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런즉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 일종의 절충적인 평균적 사회주의밖에 없는바, ...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실제적 토대 위에 놀려 놓아야 한다.”(446쪽)
Ⅱ.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전환
“그 사이에 18세기 프랑스 철학과 나란히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근대 독일의 철학이 성립하였고, 그것은 헤겔에 와서 완결을 보았다. 근대 독일 철학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변증법을 사유의 최고 형식으로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자연이나 인간의 역사 또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활동을 곰곰이 고찰해 볼 때 우리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연관들과 상호작용들의 무한한 착종(錯綜)상인바, 거기에는 사태가 어떠하며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가 불변인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고 생성하고 소멸한다. ... 원시적이고 소박하긴 하지만 사실상 올바른 이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세계관이며, 이 세계관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명료하게 표명되었다.: 만물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만물은 유동하기 때문이며,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447쪽)
“그러므로 세계 전체를, 그것의 발전과 인류의 발전을, 그리고 인간 두뇌에 비춰진 이 발전의 영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은 오로지 변증법적 방법에 의해서만, 즉 생성과 소멸, 전진적 또는 후퇴적 변화 사이의 보편적 상호 작용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임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근대 독일 철학이 즉각 등장하였다.” “이런 근대 독일 철학이 완결된 것은 헤겔의 체계에 와서인데, 헤겔의 체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 그리고 이것은 그의 위대한 공적이다 - 자연적, 역사적, 정신적 세계 전체가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끊임없는 운동, 변화, 변형, 발전 속에 있는 것으로서 파악되어 서술되었고,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헤겔의 체계가 스스로 제기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기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헤겔의 획기적인 공적은 이 과제를 제기한 데 있다.” “헤겔은 관념론자였던바, 요컨대 헤겔은 자신의 머리 속의 사상을 그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현실적 사물과 현실적 과정의 추상적인 모사로 여기지 않고 반대로 현실적 사물과 그 발전을 이미 세계가 생기기 이전에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존재하고 있던 ‘이념’이 현실화된 모사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이 머리로 서게 되었고 세계의 현실적 연관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헤겔의 체계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유산(流産)이었다. 말하자면, 헤겔의 체계는 내적인 치유할 수 없는 모순에 시달렸다: 한편으로, 헤겔의 체계는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발전 과정으로 보는 역사 파악을 본질적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 발전 과정은 그 본성 상 이른바 절대적 진리의 발견을 통해 지적 완결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과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겔의 체계는 자신이 바로 이 절대적 진리의 총화라고 주장한다. 자연과 역사에 관한 일체를 포괄하는, 그것으로 종결적인 인식 체계라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법칙과 모순된다.” “이제까지의 독일 관념론이 완전히 그릇되었음을 통찰하고 나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유물론으로 나아갔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18세기의 단순한 형이상학적 유물론, 전적으로 기계적인 유물론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의 모든 역사를 간단히 던져버리는 소박한 혁명가적 태도와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역사를 인류의 발전 과정으로 보며 이 발전 과정의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하고 있다.”(451쪽)
“1831년에는 리용에서 최초의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1838년부터 1842년에 걸쳐서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 운동인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다. 유럽의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에서 한편으로는 대공업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롭게 획득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투쟁은 그 나라들의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하거나 자유경쟁의 결과로 전반적 조화와 전반적 국민복리가 실현된다고 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학설이 거짓말임은 사실들에 의해 확실하게 폭로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태들은 더 이상 부인될 수 없는 것들이었으며, 매우 불완전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태들의 표현인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부인될 수 없었다.”
* 이 시기에 일어난 독일의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1844년 6월)도 참조
“새로운 사실들은 지금까지의 역사 전체를 새로이 연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졌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 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 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헤겔은 역사 파악을 형이상학에서 해방시켰으며, 그것을 변증법적이게 만들었다 - 그러나 그의 역사 파악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적이었다. 이제 관념론은 그 최후의 도피처였던 역사 파악에서 추방되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 등장하였으며, 그리하여 지금까지처럼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대신에 인간의 존재로부터 인간의 의식을 설명하는 길이 발견되었다.”(453쪽)
“이로써 이제 사회주의는 더 이상 이러저러한 천재적 두뇌의 우연한 발견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투쟁의 필연적인 산물로서 보였다. 사회주의의 과제는 더 이상 가능한 한 완전한 사회 체계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급들과 그들의 상호투쟁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고 이를 통해 창조되는 경제적 상황에서 충돌의 해결을 위한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파악과 이제까지의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었던바, 이는 프랑스 유물론의 자연 파악이 변증법 및 근대 자연과학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까지의 사회주의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그 결과들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그저 나쁜 것으로 보고 배격하는 것뿐이었다. 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분리될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극구 반대하는 것에 열심이면 열심일수록, 점점 더 사회주의는 이 착취의 요체가 어디에 있으며 이 착취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업은 <1>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그것의 역사적 연관과 관련하여 서술하는 것, 따라서 그것의 몰락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것이며, <2>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은폐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내적 성격을 벌거벗기는 것이다. 이 작업은 잉여가치 폭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음과 같은 것이 증명되었다. 불불 노동의 전유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 형태이자 이 생산 방식을 통해 완성되는 노동자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것; 상품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가지는 가치 그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경우에도 노동자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뽑아낸다는 것; 그리고 종국적으로 이 잉여가치는 유산계급의 수중에 부단히 증대되며 누적되는 자본량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가치 액을 형성한다는 것. (이로써/역자)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생 기원과 자본 생산 모두가 설명되었다.”
“이 두 가지 위대한 발견들은 마르크스의 공로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 그리고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 이 발견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과학이 되었으며,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과학을 모든 개별성과 연관성의 지점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다.”(454쪽)
Ⅲ. 과학적 사회주의의 사회주의관
“유물론적 역사관은 다음의 명제들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생활을 지탱하는 수단들의 생산이, 그리고 생산 다음으로는 그 생산물들의 교환이 모든 사회질서의 기초이다; 역사상 등장한 그 어떤 사회에서도 생산물의 분배는, 이와 아울러 계급들이나 신분들로의 사회적 편제는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는가에 따라, 그리고 생산된 것들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회적 변화들과 정치적 변혁들의 최후의 원인들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심화되는 통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의 변화들에서 찾아야 한다; 해당 시기의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 ... 이것과 동시에 발견된 폐해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도 역시 변화된 생산관계들 자체 내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수단은, 머리에서 고안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현존하는 물질적 사실에서 발견해야 할 어떤 것이다.”(455쪽)
“그러면 이렇게 볼 때 현대 사회주의의 사정은 어떠한가? 현존하는 사회질서는 - 지금은 꽤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 오늘날의 지배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의해 창조되었다.”
“한때 매뉴팩처와 이 매뉴팩처의 영향 아래에서 더욱 발전하였던 수공업이 쭌프트의 봉건적 족쇄들과 충돌했던 것처럼 대공업도 더욱 완전히 개선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옥죄고 있는 한계들과 충돌하였다. 새로운 생산력들은 이미 그것들의 부르주아적 이용 형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 현대 사회주의는 이 사실적 충돌이 사상에 반영된 것, 무엇보다도 이 충돌에 의해 직접적으로 고통 받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머리라는 거울에 비쳐진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455~456쪽)
“그러면 이 충돌의 요체는 어디에 있는가? 분산되고 협소한 생산수단을 집적시키고 확대하여 현재의 생산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렛대로 바꾸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그것의 담지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부르주아지가 15세기 이래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이 역할을 역사적으로 수행했는가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자본』 제4편에서 상세히 묘사하였다: 단순협업, 매뉴팩처, 대공업. 그러나 그것에서도 논증되었다시피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개인의 생산수단에서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요컨대 오로지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는 저 제한된 생산수단을 강력한 생산력들로 전화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 자체도 일련의 개인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위로 전화하였고, 생산물도 개인들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전화하였다. 이제는 공장에서 나오게 된 방사, 직물, 금속제품 등은 많은 노동자들의 공동생산물이 되었으며, 요컨대 완성되기 전에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차례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만들었고, 나의 생산물이다.”(456~457쪽)
“그러나 사회 내부의 자연 성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성립하는 분업이 생산의 기본 형태인 곳에서는, 그 분업은 생산물들에 상품이라는 형태를 각인하며, 개별 생산자들은 상품의 상호 교환에 의해서, 즉 구매와 판매에 의해서 자신들의 다면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중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런데 개별 생산자들, 즉 상품 생산자들의 이 사회에 새로운 생산방식이 끼어들었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 성장적인 무계획적 분업의 한 가운데에 개별 공장에서 조직되는 계획적 분업을 세웠다; 개별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들어선 것이다. ... 사회적 생산은 상품 생산 및 상품 교환의 다음과 같은 이미 발견된 특정한 지렛대를 직접적 실마리로 삼아 성립하였다: 상인 자본, 수공업, 임금 노동. 사회적 생산 자체가 상품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상품 생산의 전유형태는 사회적 생산에 대해서도 통용력을 완전히 유지하였다.”(457쪽)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상품 생산에서는 노동의 산물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혀 성립될 수 없었다. ... 그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전유할 필요도 없었고, 그것은 저절로 그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생산물에 대한 소유는 자기 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타인의 조력이 사용된 경우에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부차적인 것에 머물렀으며, 또한 임금 이외에 별도로 사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쭌프트의 도제와 직인은 대가와 임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서 노동하였다. 그런데 대작업장과 매뉴팩처에 생산수단이 집적되었고, 생산수단은 사실상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마치 그것들이 전과 마찬가지로 개인들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인 것처럼 취급되었다.”
“이제까지 노동수단의 보유자가 생산물을 전유한 것은 그 생산물이 통상적으로 노동수단 보유자 자신의 생산물이고 타인의 보조노동은 예외였기 때문이라면, 이제 생산물이 더 이상 자신의 생산물이 아니고 전적으로 타인의 노동의 생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노동수단의 소유자가 계속 전유하였다. 생산물은 이제 사회적으로 산출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생산수단을 움직이고 실제로 생산물을 산출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유하기 않고 자본가가 전유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생산수단과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인들의 사적 생산을 전제로 하는 전유 형태,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보유하고 그것을 시장으로 가져가는 그러한 전유형태에 복종한다. 생산방식은 이 전유 형태의 전제를 지양함에도 불구라고 이 전유 형태에 복종한다, 새로운 생산방식에 자본주의적 성격을 부여하는 이 모순 속에는 이미 현재의 충돌 전체가 맹아적으로 놓여 있다. 새로운 생산방식이 모든 결정적인 생산 분야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모든 나라들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개별적 생산을 보잘 것 없는 잔재가 되도록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의 양립 불가능성도 더욱 명명백백해 질 수밖에 없었다.”(458~459쪽)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전화하고 자본가의 수중에 집적되자마자, 이러한 상황은 일변하였다. 개별 소생산자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점점 더 무가치한 것으로 되었다; 소생산자는 자본가에게 가서 임금을 받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전에는 예외나 임시방편이었던 임금노동은 생산 전체의 상례와 기본 형태가 되었다; 이전에는 부업이었던 것이 이제는 노동자의 유일한 활동이 되었다. 임시 임금노동자는 종신 임금노동자로 전화하였다. 게다가 이와 때를 같이한 봉건 질서의 와해, 즉 봉건 영주의 종사단의 해체, 농토로부터의 농민들의 추방 등등으로 말미암아 종신 임금노동자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자본가의 수중에 집적된 수단이 이쪽에 놓여지고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 아무것도 보유하지 못한 생산자가 저쪽에 놓여지면서 양자 사이에 분리가 완료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으로 명명백백하게 나타났다.“(459쪽)
“앞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상품생산자들의 사회, 요컨대 생산물들의 교환을 자신들의 사회적 연관과 매개로 삼던 개별 생산자들의 사회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상품생산에 근거하는 모든 사회는, 그 사회의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관련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갖고서, 자신의 특수한 교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생산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 것과 동일한 품목의 상품이 얼마나 시장에 나올지, 도대체 그 가운데 얼마나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개별 생산물이 실제적 수요를 발견할지, 그 비용을 회수할지, 또는 도대체 판매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지배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산 형태와 마찬가지로, 상품 생산은 특유한, 내재적인, 자기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무정부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통하여, 자신을 관철해 나간다. 이 법칙들은 존속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회적 연관 형태인 교환 속에서 출현하며, 개별 생산자들에 대해서 경쟁의 강제법칙으로서 통용력을 지닌다. 생산자들 자신도 처음에는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며, 오랜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점차 이 법칙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법칙들은 생산자들과 독립하여, 생산자들에 대립해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강제법칙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생산물이 생산자를 지배한다.”(460쪽)
“상품 생산이 확장되면서,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등장하면서,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상품 생산의 법칙들도 더욱 공공연하고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더욱 명명백백해졌으며 더욱 극단화되어 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사회적 생산의 이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격화시키는 데 사용한 주요한 도구는 바로 무정부 상태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모든 개별 생산기업 내에서 생산을 더욱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하는 것. 이러한 지렛대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지난날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떤 산업 부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도입되면, 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낡은 경영 방법이 자신과 병존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 동물의 자연적 입각점이 인간 발전의 정점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은 이제 개별 공장 내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의 대립으로 표현된다.”(461쪽)
* “개별 생산에서의 비상품적(사회적) 관계와 전체 사회에서의 상품(사적) 관계의 대립으로”가 아니고? 상품 생산의 관계는 무정부적 관계이면서 동시에 상호간에 사적·이기적인 관계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그 기원에 의해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이러한 두 현상형태 속에서 운동하는바, 이미 푸리에가 발견한 바 있는 저 ‘악순환’의 원을 끝없이 그린다. 물론 당시의 푸리에로서는 이 순환이 점차 좁아진다는 것, 그 운동은 오히려 하나의 나선 운동으로 진행되어 행성의 운동처럼 틀림없이 중심과의 충돌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더욱 더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화시키는 것은 바로 생산의 무정부 상태라는 추진력이며, 생산의 무정부 상태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은 다시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다. 대공업의 기계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개선 가능성을 모든 개별 자본가에게 하나의 강제 명령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바로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라는 추진력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기계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자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며, 노동수단은 지속적으로 노동자의 수중에서 생활수단을 빼앗아 가고,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은 노동자를 예속하는 도구로 전화한다. 그리하여 노동수단의 절약은 애초부터 동시에 노동력의 무자비한 낭비와 노동 기능의 정상적 조건들의 강탈로 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인 기계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전 생애를 자본의 가치화를 위해 자유로이 이용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전화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전화된다.” “상대적 잉여인구 혹은 산업 예비군이 언제나 자본축적의 규모 및 정력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법칙은 헤파이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못 박아 놓은 것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못 박아 놓는다. 그것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제약한다. 따라서 한쪽 극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다른 쪽 극에서의,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계급 측에서의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야수화, 도덕적 타락 등의 축적이다.(마르크스 『자본론』 671면)6) (462~463쪽)
“이미 보았다시피, 현대 기계의 최고도에 도달한 개량 가능성은 개별 산업 자본가에게 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상태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기계를 끊임없이 개량할 것을, 기계의 생산력을 끊임없이 높일 것을 강제 명령으로 전화한다. ... 그런데 시장의 팽창 능력은 외연적으로나 내포적으로나 무엇보다도, 훨씬 약하게 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시장의 팽창은 생산의 팽창과 보폭을 맞출 수 없다.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며,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를 폭파시켜 버리지 않는 한 해결책이 산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기적인 것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하나의 새로운 ‘악순환’을 산출한다.”
“공황이 오면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발발한다. 상품유통은 일시적으로 절멸된다: 유통수단, 즉 화폐는 유통의 장애로 된다; 상품생산과 상품 유통의 모든 법칙들이 뒤죽박죽이 된다. 경제적 충돌이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생산방식은 교환방식에 반란을 일으킨다.”(463~464쪽)
“그리하여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자신에게 더 이상 이 생산력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생산력들 자체는 모순을 지양하라고, 자신을 자본의 성질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독촉한다.”
“힘차게 성장하는 생산력들이 자신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에 이처럼 저항하고 자신의 사회적 본성을 승인하라고 이처럼 더욱 강력하게 강요함에 따라 점점 더 자본가 계급 자신은, 자본 관계 내에서 대체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들로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각종 주식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대량적 생산수단의 사회화 형태를 촉진한다. ...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도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국내의 하나의 같은 사업 부문의 대 생산자들은 ‘트러스트’, 즉 생산의 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한 연합체로 연합한다. ... 그러나 이러한 트러스트들은 영업 상태가 좋지 않은 때가 오면 곧 흩어져 버리며, 그럼으로써 훨씬 더 집적된 사회화를 재촉한다; 산업부문 전체가 단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로 전화하여, 국내에서의 경쟁은 이 회사의 국내에서의 독점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다.” (465~466쪽)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전도되고, 자본주의적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이 닥쳐오는 사회주의적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항복한다. 물론 우선은 여전히 자본가들을 위해서다. 그러나 여기에는 착취가 손에 잡힐 듯이 너무나 분명해져서, 와해될 수밖에 없다. 어느 인민도 트러스트에 의해 지휘되는 생산, 이자 표나 끊는 얼마 되지 않는 도당에 의한 전체에 대한 드러내 놓은 착취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휘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국가 소유로 전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우선 먼저 대규모의 교류시설에서 나타난다.” (466~467쪽)
“공황이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현대의 생산력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였다면, 대규모 생산 시설과 교류 시설이 주식회사와 트러스트와 국가소유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 목적을 이루는 데 부르주아지는 없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식회사로의 전화도, 트러스트로의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주식회사와 트러스트의 경우 이것은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명백하다. 그리고 현대 국가 역시 부르주아 사회가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의 침해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일반적인 외적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조직일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떠하건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기관, 자본가들의 국가, 관념상의 총자본가이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들을 더 많이 자기의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현실적 총자본가로 되며, 국민들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점에서 그 자본관계는 전도된다. 생산력들의 국가 소유가 충돌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해결의 칼자루는 그 안에 숨겨져 있다.”(467쪽)
“이 해결은 현대적 생산력들의 사회적 본성이 실제로 승인되는 것에만, 따라서 생산방식, 전유방식, 교환방식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성격과 일치시키는 것에만 놓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의 지휘 이외의 다른 어떠한 지휘에 비해도 웃자란 생산력들을 사회가 공공연하고도 솔직하게 점유 획득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한사코 생산력들의 본성과 성격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한 - , 그런 한 이 힘들은 위에서 상세히 서술한 바와 같이 우리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런 한 우리를 거역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며, 그런 한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일단 그 본성이 파악되기만 하면, 이 생산력들은 연합한 생산자들의 손에 의해 악마적 지배자에서 순종적 하인으로 전화할 수 있다. ... 이처럼 오늘날의 생산력들을 마침내 인식된 그 본성에 의거하여 취급하면,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전체와 각 개인의 욕구에 의거한 생산의 사회적-계획적 조절로 대체된다. 그럼으로써, 생산물이 처음에는 생산자를 예속시키고 다음에는 전유자까지 예속시키는 자본주의적 전유 방식은 현대적 생산수단 자체의 본성에 기초한 다음과 같은 생산물의 전유 방식으로 대체된다: 한편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전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수단 및 향유수단으로서의 직접적인 개인적인 전유.”(469쪽)
* 개인적인 것은 곧 사적 개인적인 것으로 오해. 그에 따라 전유문제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오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인구의 대다수를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로 전화시킴으로써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변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력을 창조한다. 이 세력은, 사회화된 대규모 생산수단을 국가소유로 전화시킬 것을 재촉함으로써 그 스스로 변혁의 수행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소유로 전화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며, 그리하여 모든 계급 차이와 계급 대립을 지양하고, 그리하여 국가로서의 국가도 지양한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적인 대표자, 사회 전체가 가시적인 한 단체로 집약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랬던 것은 그 시대에 그 자신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던 계급의 국가인 한에서만 그러하였다: 고대에는 노예를 소유한 공민의 국가, 중세에는 봉건 귀족의 국가, 우리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국가. 국가는 마침내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되면서 자기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억압해 두어야 할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계급지배와 아울러, 이제까지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에 기초한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아울러, 그로부터 생겨난 충돌과 폭행이 제거되자마자, 진압할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특수한 억압 권력인 국가를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국가가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서 취하는 최초의 행동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점유 획득하는 것 - 은 동시에 국가로서의 최후의 자립적 행동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분야 한 분야에서 차례로 불필요하게 되어 나중에는 저절로 잠들게 된다. 사람들에 대한 통치 대신에 물건들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휘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문구는 이점에 비추어 평가해야 하는바, 선동적 측면에서 갖고 있는 일시적 정당성도, 과학적 측면에서 갖고 있는 결정적 불충분성도 이 점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금명간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이 점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469~470쪽)“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억압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은 이전에 생산의 발전이 미약했던 데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사회적 총노동이 제공하는 수익이 모두의 궁핍한 생존에 요구되는 물량을 간신히 초과하는 정도인 한, 따라서 노동이 대다수 사회 성원의 모든 시간 혹은 거의 모든 시간을 요구하는 한, 이 사회는 필연적으로 계급들로 분할된다. 전적으로 노동에 부역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과 나란히, 직접적-생산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음과 같은 사회의 공동 업무를 돌보는 계급이 형성된다: 노동의 지휘, 국무, 사법, 과학, 예술 등등. 따라서 계급 분할의 저변에 놓여 있는 것이 분업의 법칙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계급의 분할이 폭력과 강탈, 간계와 기만에 의해 관철되었다는 사실과 지배계급은 일단 권좌에 앉기만 하면 예외 없이 근로계급을 대가로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했고 사회적 지휘를 대중에 대한 증대하는 착취로 전화시켰다는 사실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470쪽)
“그런데 이처럼 계급분할에 일정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주어진 시기, 어떤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만 그러하다. 계급분할은 생산의 불충분함에 근거한다; 그것은 현대의 생산력의 완전한 전개를 통해 일소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계급의 폐지는, 이러저러한 특정한 지배계급이 현존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배계급 일반, 따라서 계급 차이 자체가 있다는 것까지도 하나의 시대착오가 되고 낡아빠진 것이 되는 그러한 역사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특수한 사회계급이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전유하며 그럼으로써 정치적 지배를 전유하며 교육과 정신적 지휘를 독점하는 것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지적 발전의 장애로도 되는 그러한 생산의 높은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 도달한 것은 지금이다.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파탄과 지적 파탄이 그들 자신에게도 거의 비밀이 아니라면, 그들의 경제적 파탄은 십년 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전유는 생산에 대한 현존하는 인위적 제동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현재 생산에 불가피한 동반자이며 공황 때에 정점에 달하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확실한 탕진과 유린도 제거한다. 나아가 그것은 지금의 지배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의 어리석은 사치성 낭비를 제거함으로써 전체를 위하여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본질적으로 완전히 넉넉하고 나날이 부유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육체적 및 정신적 소질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도야와 실현까지도 보장하는 생존을 확실히 해 줄 가능성, 이러한 가능성은 지금 처음으로 존재하는데, 그것은 여기에 존재한다.”(471쪽)
“사회에 의한 생산수단의 점유 획득과 함께 상품 생산은 제거되며, 그럼으로써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상태는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화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중지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정적으로 동물계를 벗어나고, 동물적 생존 조건으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의 길로 들어선다. 인간을 에워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조건의 전역이, 자기 자신의 사회화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또 사회화의 주인이 되면서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주인이 된 인간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들어온다. 이제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 자연법칙으로서 인간과 대립하고 있던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위의 법칙은 그렇게 되면 인간에 의해 완전히 전문적 지식의 도움을 얻어 이용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지배될 것이다. 이제까지 역사를 지배해 온 객관적이고 외적인 힘들은 인간들 자신의 통제 아래로 들어온다. 인간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게 되며, 인간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적 원인들은 이때부터 비로소 주로, 점점 더 그들이 원하는 작용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이다.” (472쪽)
<결론적 개괄>
Ⅰ. 중세 사회: 소규모의 개별적 생산. 개별적 사용을 위해 만들어져서, 원시적이고 쓸모없고 자질구레하고 효과가 보잘것없는 생산수단. 생산자 자신의 소비이든 그의 봉건적 영주의 소비이든 생산물의 직접적인 소비를 위한 생산. 이 소비를 초과하는 생산의 여분이 있게 되는 경우에만 그 여분의 판매를 위해 내놓아지고 교환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미 그것은 생산의 무정부 상태를 맹아로서 내포하고 있다.
Ⅱ. 자본주의 혁명: 우선 단순협업과 매뉴팩처를 매개로 한 산업의 변혁. 이제까지 분산되어 있던 생산수단의 커다란 작업장으로의 집중. 그럼으로써 개별적 생산수단으로부터 사회적 생산수단으로의 전화 - 대체로 교환형태에는 손대지 않는 전화. 낡은 전유 형태는 여전히 힘을 갖는다.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는 생산수단의 소유자 자격으로 생산물도 전유하며, 그것을 상품으로 만든다. 생산은 사회적 행위로 된다; 교환이나 그와 함께 생산물의 전유는 여전히 개인적 행위, 개개인의 행위이다: 사회적 생산물이 개별 자본가에 의해 전유된다. 오늘날의 사회가 움직여지고 있는 대공업이 명명백백하게 공공연히 드러내는 모든 모순들이 발생하는 기본모순.
A.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생산자의 분리. 노동자에 대한 종신 임금노동의 판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
B. 상품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의 성장하는 돌출과 증대하는 작용. 고삐 풀린 경쟁 투쟁. 개별 공장 내에서의 사회적 조직화와 전체 생산 내에서의 사회적 무정부상태 사이의 모순.
C. 한편으로는, 기계의 완성은 경쟁을 통해 개별 공장주들에게 강제 명령으로 되며, 그와 동시에 노동자의 축출이 부단히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예비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되는데, 이 또한 모든 공장주에게는 경쟁의 명령이다. 이 두 가지 측면으로부터 나타나는 생산력의 전대미문의 발전, 수요를 초과하는 공급의 여분, 과잉생산, 시장의 범람, 십년마다의 공황, 악순환: 한쪽에서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과잉 - 다른 쪽에서는 일자리와 생존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과잉; 그러나 생산과 사회적 복지의 이 두 지렛대는 결합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생산력과 생산물이 미리 자본으로 되어 있지 않는 한 생산력이 작용하는 것도 생산물이 유통되는 것도 금하기 때문이다: 바로 생산과 생산물의 과잉이 [그것을] 방해한다. 이 모순은 배리(背理: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상승한다: 생산방식이 교환형태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승복한다.
D. 자본가 자신에게 강요된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부분적 인정. 대규모의 생산 및 교류 조직의 처음에는 주식회사에 의한, 다음에는 트러스트에 의한, 그다음에는 국가에 의한 전유. 부르주아지는 불필요한 계급임이 입증된다; 그들의 모든 사회적 기능은 이제 봉급을 받는 직원들에 의해 완수된다.
Ⅲ. 프롤레타리아 혁명, 모순의 해결: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권력을 장악하며, 이 권력의 힘으로 부르주아지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지는 사회적 생산수단을 공적 소유로 전화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을 자본이라는 이제까지의 특성에서 해방시키며 그 생산수단에게 사회적 성격이 관철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준다. 미리 규정된 계획에 의한 사회적 생산이 이제 가능하게 된다. 생산의 발전은 서로 다른 사회계급이 더 이상 실존하는 것을 시대착오로 만든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국가의 정치적 권위도 잠든다. 마침내 자기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주인이 된 인간은 그와 함께 동시에 자연의 주인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된다 - 자유롭게 된다.
세계를 해방하는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소명이다. 이러한 과업의 역사적 조건과 아울러 그 과업의 본성 자체를 깊이 캐는 것, 그리하여 이 과업을 행동으로 옮길 소명을 지닌 오늘날의 피억압 계급에게 그들 자신의 행동의 조건과 본성을 의식하게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이론적 표현인 과학적 사회주의의 임무이다.(472~474쪽)
* 엥겔스의 사회주의관의 문제점
1. 사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1) 사회구성체의 토대를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보지 않고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로 파악하는 점. 교환관계란 즉 상품교환관계를 지칭하는 데, 그것은 상품생산이라는 생산관계의 현상형태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지 않고 상품관계를 교환관계로 파악할 경우 상품관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정부성의 문제로 협소해진다. 즉 교환관계의 무정부성을 제거하여 계획적 교환관계로 바꾸면 충분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사회주의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로 단순화된다. 가치에 따른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생산수단이 국유화된다고 하여 생산관계가 사회화하는 것은 아니며, 교환이 계획화한다고 하여 사회적 생산의 사적인 수행이라는 상품생산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관계인 상품생산 관계 또한 사회화해야만 그 모순이 극복된다.
2) 사회주의 사회의 소유관계에 대하여 커다란 혼선을 빚고 있다. 생산수단은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소비수단은 개인적으로 소유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개인적 소유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소유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그릇됨은 앞에서 지적했다.7)
3) 자본주의의 발생과 관련하여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생산관계가 변한다는 극히 도식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산력주의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조응해야 하지만, 반드시 생산력이 먼저 발전하고 나서 그것에 뒤따라 생산관계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관계가 먼저 변화할 수도 있다. 생산관계가 먼저 변화하더라도 그에 뒤따라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하면 그 관계는 지속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또 이렇다 할 생산력 변화 없이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발생했지만 산업혁명을 통해 비로소 자본주의가 제 발로 서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발생을 가내수공업과 매뉴팩처를 비교하여 후자가 생산력이 높았기 때문에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매뉴팩처는 선대제와 병존했고 매뉴팩처는 독립자영농의 수공업에서 아래로부터 발전하기도 하지만 선대제 상인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건 매뉴팩처가 확대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자본가적 지주인 젠트리들이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수탈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대적인 농민수탈로 무산대중이 형성되고 이들을 매뉴팩처가 고용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뉴팩처의 높은 생산력 때문인가? 아니면 자본가적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폭력적 토지수탈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성되고 이들을 자본자(농촌의 차지농과 부유한 수공업자)와 지주층(향촌 지주와 선대제 상인)이 매뉴팩처를 조직했기 때문인가? 많은 경우 후자로 인해 매뉴팩처가 발생했으나 그것이 지속된 것은 생산력이 가내수공업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제 대공업과 같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생산력은 아니었으므로 얼마든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생산력의 한계가 산업혁명을 통해 극복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는 자기 발로 서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장제 수공업이 가내 수공업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영국에서 매뉴팩처가 발전한 것이 아니고 영국에서 농노가 가장 먼저 독립자영농민으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독립자영농민이 부르주아적 세력들에 의해 토지를 수탈당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매뉴팩처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널리 발전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구체성을 무시하고 도식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농노에서 해방된 독립자영농 가운데서 머리 좋고 부지런한 자들이 상품생산으로 부유해지고, 이들이 여타의 머리가 나쁘고 게으른 가난한 농민들을 임금노동자로 조직하여 매뉴팩처를 발전시켰다는 농민 양극분해론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제트리들은 어디로 갔으며 또 그 많은 요맨리들은 어디로 갔는가? 젠트리는 자본가가 되었으며, 요맨리는 하강분해하여 일부분을 빼고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않았는가?
엥겔스는 반 뒤링론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 즉 생산양식의 변화를 낳는 것이지 폭력이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폭력이 그것만으로 사회적 관계의 진보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원시공산제에서 노예제의 이행을 생산력 발전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원시공산제에서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이 타인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지만 폭력에 의하여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노예제는 성립할 수 없었다. “폭력은 혁명의 산파다” 즉 폭력 없이 국가의 탄생도 자본주의의 발생도 설명할 수 없다. 역사발전은 생산력 발전의 기계적 산물이 아니고 이것을 하나의 조건으로 하여 벌어지는 폭력적 계급투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생산력 발전이 선행할 수도 있고 계급투쟁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혁이 선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민족해방 투쟁을 비롯하여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려는 폭력적인 계급투쟁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리하여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수립되지 않았다면 한국의 지금과 같은 생산력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2.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모순
1)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모순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사적 성격의 모순이라는 엥겔스의 주장은 타당한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을 사회적 생산이라고 한다. 그것은 수공업의 개인적·개별적 생산과 대비된다. 그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대립하는 관계로 설정한다. 마르크스도 초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론』 1권 불어판 제32장을 수정하여 독립자영농민의 생산 이전의 전근대적(봉건적) 생산을 사회적·집단적 소유로부터 집단적 소유라고 수정했다.8) 개인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과 대립하지 사회적인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근대의 개인적인 것은 전근대의 집단적인 것을 해체하면서 등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집단적인 것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단순상품생산은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대체되는데, 이때 사적인 것인 상품관계는 계승되지만 ‘개인적’인 것은 ‘자본가적’인 것으로 부정된다. 이것은 생산이 집단적으로 수행되면서 그 생산과정과 생산물이 전근대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것으로 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생산양식에서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는 인식 자체가 마르크스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엥겔스는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자본론』 독어판 1권에서 “개인들의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둔 분산적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이미 사실상 생산수단의 사회적 이용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래 걸리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인 것은 당연하다.”고 되어 있었으나 불어판에서는 ‘이미 사실상 집단적 생산방식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으로 변경되었다.9) 이것은 마르크스가 사회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구별했음을 뜻한다. 자본주의 생산은 집단적이지만 사회적인 것은 아니라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한 것이다.
2) 만약 자본주의 생산이 집단적이지만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면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모순도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사적 성격의 모순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종래처럼 생산이 집단적이면서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고 파악할 경우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모순의 해결은 생산의 측면은 그대로 가져가고 전유의 측면만 개조하면 되는 것으로 단순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이미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전유만 사적 전유에서 사회적인 전유로 바꾸면 곧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사적 성격의 모순도 해결될 것이다. 이 경우 다만 교환의 문제, 즉 상품교환의 무정부성 문제가 이와 별도로 남는데, 그것은 생산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교환관계의 문제이므로 상품생산은 그대로 두고 교환방식을 개조하면 해결될 것이다. 즉 상품교환의 계획이 요청된다. 그게 이른바 국유화와 계획경제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 안에서의(마이크로코즘) 주된 모순은 무엇인가?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착취 관계이다. 이것이 사라지려면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노동자 집단의 소유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집단적 소유가 개인적 소유와 결합하지 않으면 전근대의 집단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는 소외된다. 그러므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노동자들의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인 소유로 되어야 한다. 즉 집단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생산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전유 또한 사회적 성격을 띨 것이다. 즉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인 생산과 전유로. 요컨대 생산이든 전유든 집단적으로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사회적인 것 즉 집단적민서 동시에 개인적인 것으로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 사회적으로는(매크로코즘) 어떻게 되는가? 개별 기업에서 생산과 전유가 사회화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없다. 생산자들은 여전히 서로 상품생산자들로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전 사회적 차원에서 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이 상품생산관계 또한 사회적인 것으로 변혁되어야만 할 것이다. 즉 사회적 생산(마이크로코즘에서)을 사적으로(매크로코즘에서) 수행하는 데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생산을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개별 기업에서 나아가 전 사회적으로 생산이 사회적으로 즉 집단적·개인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가 하나의 사회화한 기업처럼 통합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한 기업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아니 한 기업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체 차원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생산물들은 전 사회적으로 전유될 것이며 그것의 처분과 분배는 사회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생산수단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사용되고, 소비수단에서도 사회적 소비수단은 사회적으로 사용되고, 개인적 소비수단에 대해서만 각 개인들에게 분배될 것이다. 이 경우 낮은 단계에서는 일부는 필요에 따라 일부는 노동량에 따라. 높은 단계에서는 전부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노동량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각종 노동에 대한 상대적 평가는 시장의 양육강식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고 사회적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등등.
만약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엥겔스 식으로 상품생산관계는 그대로 둔 채 즉 가치법칙의 작동을 그대로 둔 채 계획만 도입할 경우 구소련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은 기업별로 파편화되고 기업 간 생산성 차이를 낳게 될 것이며, 이것은 다시 기업 내에서도 노동자들 상호간의 차등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사회적 연합은 해체될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로의 회귀로 귀결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소련식의 자율재정체제(auto-finance system)10)에 반대하고 예산재정체제(budgetary financing system)를 주장한 체 게바라의 논문들과 그와 소련 이론가들의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1)
3) 이처럼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면 자본주의 근본모순은 도대체 무엇인가? 초현대적 생산력과 낡은 생산 제 관계의 모순이 아닐까? 그 낡은 생산 제 관계는 자본생산관계와 상품생산관계의 복합물이다. 자본관계는 상품관계를 전제로 하고 자본관계는 상품관계를 일반화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모순이 이러하다면 이 모순은 낡은 자본-임금노동의 타파(이른바 노동해방)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낡은 계급적 지배·착취 관계 및 그것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낡은 사회적 분업관계인 상품생산관계 양자 모두를 타파하고 생산자들의 수평적 연합의 관계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개별기업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 차원에서 그렇게 대체해야 할 것이다. 그 두 차원 가운데 어느 하나만 바꾸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공고하게 이루어지려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형성되고 길들여진 사적 개인이 아니라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스스로를 사회적 개인으로 변혁해야만 할 것이다. 인간성의 그러한 변혁이 없이는 실패한 소련의 역사에서 증명되었듯이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로 회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적 개인 즉 쁘띠부르주아적, 소소유자적 개인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개인, 프롤레타리아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인간해방이다!
1)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145~159쪽에서 발췌.
2) 『자본론』 1권 제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1045~1046쪽
3) 『자본론』 1권 1장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4)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405쪽에서 475쪽에서 발췌.
5) 박종철 출판사 판 번역에서 50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영어판 선집과 대조하여 5년으로 오역을 바로잡았습니다.
6) 『자본론』 1권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김수행 번역, 2015년판 879쪽
7) 이 글의 「1. 반뒤링론에 대하여」를 보시오.
8) 『자본론』 1권 불어판 556쪽
9) 『자본론』 1권 불어판 558쪽
10) 이 제도는 self-finance 또는 self-management system이라고도 불렸다.
11)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Man and socialism in cuba - the great debate), 1971 중의 「On the Budgetary Finance System」을 비롯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하는가를 둘러싼 체 게바라의 글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