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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의 인간관, 카스트로의 현실주의

  • 작성자
    관리자
  • 날짜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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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1

게바라의 인간관


조금 시각을 달리 해서 쿠바 사회주의의 커다란 특징인 ‘새로운 인간’, 달리 말하면 쿠바 사회주의의 이념문제를 검토하여 보자. 쿠바 혁명은 ‘7월 26일 운동’이라는 소수 정예주의 소집단에 의해 발전하고 수행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정당과 조직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적인 건설사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게릴라 시대처럼 “군사적인 승리가 정치적 전망을 열어준다”고 생각하여 정치를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여길 수는 없었으며, 정치야말로 모든 것의 중심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정치적인 결정에 따라서 그것을 현실에 옮겨줄 실무자와 관료가 필요하였다. 또 ‘7월 26일 운동’ 집단이 쿠바의 현실적 문제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을 때, 게바라는 사회주의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했으며 또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혁명의 ‘시발지’ 모스크바에 의거해서 비로소 혁명을 유지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그 결과 구인민사회당=구공산당계의 인사가 중시되게 되었다. 브라스 로카, 라파엘 로드리게스, 아니발 에스카란데와 같은 구인민사회당계 사람들은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을 그대로 도입하여 쿠바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7월 26일 운동’계의 사람들 특히 게바라와 대립하였고 여기에서 논쟁이 전개되었다.


60년대에 들어와 소련은 경제적 위기에 몰려있었다. 국민총생산의 25%를 넘는 부분을 투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는 군수산업, 우주개발산업에 집중되고 반대로 소비재 부문에는 별로 투자되지 않는 불균형이 문제였다. 이 결과 중앙의 소련연방국가 계획위원회가 무력하게 되어 계획 경제를 충분히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이 논의가 발전하여 사회주의에서도 각 기업은 독립성을 갖고 제각기 경쟁해야 하며 ‘사회주의 시장’을 통해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고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제에는 중앙의 정치기관이 사회주의의 의미와 그 자본주의에 대한 우위성을 역설하여 대중을 교육하고 그 의식에 기초하여 경제를 계획하더라도, 현재의 소련처럼 미개발된 사회에서는 일반대중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해서 사회주의적인 의식을 가지는 것은 어려우므로, 사회주의의 이념 보다는 물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보증하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소위 ‘물질적 자극론’이다. 이 논의는 소련에서 공식적이고 전면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도입되어 정책에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동구국가들의 사회주의에는 이 경향이 강했다. 쿠바의 구인민사회당계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를 쿠바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게바라였다. 게바라에게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행한 게릴라 운동의 사상이 살아 있었다. 혁명의 객관적 조건보다는 진실로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던 생각은 사회주의 건설에 직면하여서는 우선 진실로 대중의 사회를 자신의 손으로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의식과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연결되고 있다. 게바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탐욕스런 식민주의와 결합하여 부패의 극에 달한 자본주의 세계를 넘어서 성립한 쿠바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기초로 하여 사회주의로서의 이념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 이념은 게릴라 전사의 숭고한 자기희생적인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 7월 26일 운동 ’ 계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게바라적인 발상을 어떤 식으로든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가 집약된 것이 ‘새로운 인간’(nuevo hombre)이었다. 이 인간은 집단적 계획에 따라서 자기에게 할당된 노동을 적극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물론, 그 밖의 쿠바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곳이면 어디나 자신의 사적인 생활은 던져버리고 달려가는 노동자이며, 타국이 침공작전을 전개한다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쿠바를 절대적으로 사수할만한 정신을 가진 의용민병이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새로운 인간’이 지도부의 밑에서 계획적으로 노동하는 것에 의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과 그 지도 밑에 있는 동구 나라들의 상태는 정치적 이념을 망각하고 일종의 금전주의에 빠져 낡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치관을 그대로 온존시키며 발전이 계속되면 될수록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이 문제가 되는 체제로 게바라에게 비친 것이다. 1964년 게바라가 소련을 방문하여 학생 및 학자와 토론했을 때, 한 소련 학생이 자기자본을 사용하여 투자하게 된다면 각 기업은 소비자의 수요에 생산을 적합시키게 되고 결국 채산을 높이게 되어 바람직하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 “그러한 제도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 제도 자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혁명 전의 쿠바에서 실시하고 있던 제도이고, 현재에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제도이다”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65년 2월의 아시아, 아프리카 민중연맹회의에서 행한 게바라의 사회주의 비판 발언도 이상과 같은 문맥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7월 26일 운동’계 사람들이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이 게바라적인 발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쿠바에서는 ‘새로운 인간’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제창된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는 쿠바의 노동자도 바티스타체제하의 금권주의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금전을 원하는 의식이 강하였고, ‘새로운 인간’을 정착시키는데 따르는 어려움이 크게 존재하고 있었다. 게바라도 이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 속에 깔려있는 인간은 금전만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고 귀하고 숭고한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경시하였고, 현재의 쿠바 노동자의 체질에 금전주의가 있더라도 가까운 장래에는 반드시 그것을 일소하여 ‘새로운 인간’을 정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바라는 이러한 이념을 가진 사회주의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여 중앙집권제에서의 공업우선 정책을 제시하였고, 이것에 의해서 쿠바의 모노컬츄어를 해소하고 물질중심의 소련식 사회주의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현실주의


그러나 카스트로는 게바라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는 게바라와 동일하게 사회주의의 이념을 강조했지만, 재생산력을 특징으로 하는 당시의 쿠바경제와 그것에 규정된 국민대중의 의식을 게바라와는 다른 각도로 고려하였다. 카스트로는 국민의 의식이 낮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하였다. 69년 단계에서도 그는 “오늘날 생산력을 저해하는 것은 사회적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 요인이면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 자신 의무적인 것이다”라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하물며 65년 이전 단계에서 카스트로가 가는 곳마다 국민의 의식이 낮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극복을 호소했던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카스트로의 엄격한 대중 파악은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인간’의 가치 아래서 대중에게 모노컬츄어 해소를 위해 궁핍생활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카스트로는 게바라의 정신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전면적으로 의거하여 국민에게 궁핍생활을 강제하고 단번에 모노컬츄어 해소를 위하여 달리는 것은 위험하므로 사탕을 철저하게 증산하여 소련에게 판매하고 반대로 그 소득으로 모노컬츄어 해소를 위한 전망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부작용 - 소련식 사회주의- 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방지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전개되었다.


카스트로는 사탕생산을 핵으로 한 농업중심주의를 지탱해주는 장기무역협정의 구체적 내용에 대하여 63년 4월부터 6월에 걸친 소련 방문 기간에 후르시초프와 단둘이서 결정했다. 그리고 귀국 후 그는 게바라가 장관으로 있는 공업성으로부터 사탕문제만을 관할하는 전문성을 분리하여 신설했다. 물론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이러한 의견 대립 때문에 게바라의 지위가 현저하게 저하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게바라는 여전히 정치국원이었고, 쿠바의 경제문제에 대한 최고의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다. 


그러나 게바라 지도하에 있는 공업성으로부터 사탕문제가 전문화되어 독립했다는 사실은 카스트로가 ‘새로운 인간’에 기초한 사회주의라는 커다란 테두리 내에서 게바라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에서는 의견의 대립이 있다는 것과 게바라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던 카스트로는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조치를 매우 열심히 강구하였다. 첫 번째 조치는 구인민사회당계의 인물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카스트로는 62년 3월,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통해서 구인민사회당 간부이자 통일혁명조직의 지도부원이었던 아니발 에스카란테를 분파주의적 행동가라고 비난하고 자기비판을 요구했으며, 그 후 68년 1월에 에스카란테를 비롯한 구인민사회당 간부 8명을 고발하고 유죄를 언도하여 실각시키기까지 일관하여 구인민사회당원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두 번째 조치는 소련 의 ‘평화공존노선’에 대해서 간접적인 비판을 전개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62년의 ‘쿠바위기’에서 후루시초프가 쿠바와 상의하지 않고 케네디와 ‘타협’하여 미사일을 쿠바로부터 철수시킬 것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라틴아메리카제국의 공산당 비판과 67년 7월의 라틴아메리카 연대기구에서의 무력혁명론 그리고 땟(tết) 공세(1968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환점으로 현지 명절인 설날의 이름을 빌려 '땟(tết) 공세' 또는 구정공세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베트남과의 관계에서 식민주의적인 미국정부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따위의 목가적인 희망은 참으로 무의미하다”라고 말한 소련 비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조치는 게바라 자신에게 소련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시키는 것이었다. 공업성으로부터 사탕문제를 다루는 전문성이 분리된 무렵부터 게바라의 소련비판은 심해 졌다. 그는 63년 6월 《예산제도에 놓여진 기업에 관한 경제분석의 기초로서의 생산량에 관한 고찰》을 발표하고, 이것에 의하여 상품의 개념을 분명히 하여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의 ‘상품’은 자본주의체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동구의 ‘개혁파’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에 이어서 저술한 《가치의 개념에 대하여》, 《은행 • 신용 및 사회주의》, 《경제계획의 의의》는 모두 소련과 동구 등이 생각하고 있는 물질적 자극, 기업 독립채산 등이 사회주의 이념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 논문이었다.


이상과 같이 쿠바 혁명을 생각하여 볼 때 쿠바사회주의는 게릴라 노선을 포기함에 따라 소련의 노선과 일체화되었으며, 세계가 비판하고 있듯이 권위주의, 관료주의, 물질주의로 변해가고 있다고 단순하게 비판 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게바라는 65년, 쿠바에서의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고 말하고 ‘혁명의 여정’에 나서서 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정수를 전해주는 게바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카스트로에게 살아 남아있다. 우리는 때로는 쉽게 소련을 옹호하고 때로는 엄격하게 비판하는 등,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카스트로의 태도에서 개인적 퍼스낼리티의 문제를 떠나 냉정한 국제관계 가운데 모노컬츄어로 속박된 쿠바라는 작은 나라를 국민적 생산력에 기초한 균형있는 경제를 가진 나라로 개혁하여 가는 과정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틴아메리카 변혁사’에서 발췌, 출판사 백산선서, 巢山靖司지음, 서경원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