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악법 철폐 투쟁의 의의와 방도
김승호 지도위원
1. 노동악법 철폐 투쟁의 의의
1) 노동악법의 역사와 철폐 투쟁의 역사적 의의
- 현행 노동법, 구체적으로 집단적 노사관계에 의한 법은 노동자의 단결⸳투쟁권을 보호⸳보장하는 법이 아니라 그것을 억압⸳통제하는 법이다. 조경배 교수가 말했듯이 이 법의 기조는 치안경찰법적이다. 현 노동관계법에는 대부분의 조항이 노동조합의 결성과 단체교섭 및 단체행동에 관하여 이러저러하면 아니 된다는 금지조항과 이것을 어겼을 때 행정관청이 이를 어떻게 조치하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형사처벌 하느냐 하는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징역, 벌금, 과태료)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런 노동법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다.
- 이 노동법은 1953년 제정될 당시부터 이와 같은 치안유지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식민지 모국인 미국에서는 1935년에 ‘와그너법’이라는 전국노사관계법(NLRA)이 제정되어 노동조합의 결성과 파업을 보장하는 바탕 위에서 정부가 분쟁을 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쟁의활동을 포함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사용자의 개입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 와그너법은 루스벨트 정부의 친노동 정책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이 법은 1934년 서부연안 항만노동자 총파업과 미니애폴리스 화물노동자 총파업을 경험하면서 루스벨트 정부가 계급투쟁을 조절하기 위해 법제화한 것이었다.1)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자본계급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자 양보했던 이 법을 폐기하고 1947년 6월 태프트 하틀리법2)을 제정했다. 이 법은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통제하는 것이 기조였다. 그리고 이 법의 정신이 미군정 하에서 한국에 적용되었다. 이 법의 기조 하에 1947년 6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정치색을 띤다는 이유로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탄압기조가 미 군정청의 법령에서 나아가 대한민국의 1953년 노동법으로 이어졌다.3)
- 더욱 문제인 것은 이 법은 그 후 계속 개악을 거듭해 왔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노동법을 전면 개정하는데, 이때 복수노조금지를 비롯하여 행정관청의 개입과 통제를 더욱 조밀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4,19혁명 이후 봇물처럼 터져나온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법적으로 확실하게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였다. 이 노동법 하에서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지배⸳개입 하에서 노동조합은 자유로운 단결과 투쟁을 할 수 없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항거한 데에는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사용주의 행위도 문제이지만 노동자가 스스로 단결하여 투쟁할 권리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분신항거 이후 전태일의 친구와 어머니는 근로기준법 준수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인정해 줄 것을 정부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박정희 노동법체제 아래서는 자주적인 노동조합의 결성과 합법적인 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태일의 분신항거는 관제어용 한국노총과 회사어용 기업별 노조로 구성된 박정희 노동체제 및 그것을 떠받드는 한 축인 노동법의 철폐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 것이다.
-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전태일의 이 요구를 받아 안기는커녕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반포했다.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유보’라는 이름하에 금지됐다. 이런 무권리 상태에 대한 저항으로 터져나온 것이 1979년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농성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단적으로 짓밟았고 이것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지고, 10.26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로 이어졌다.
- 그러나 박정희 죽음을 계기로 열린 민주화의 봄은 전두환 일당의 5.18쿠데타로 유혈진압됐다. 전두환 일당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여러 가지 법을 제정했는데, 이때 노동법도 전면 새로 제정했다. 이 법에서는 기업별 노조 형태가 강제되고, 노동자 간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 제3자개입 금지 조항이 신설되었으며, 국가가 승인한 노동조합이 아니면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도 신설됐다. 또 노동조합의 설립은 종업원 30명 이상 또는 1/5이상이 동의해야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노동조합의 임원은 회사에 취업한 지 일정 기간이 경과해야 하며, 전과기록이 없어야 했다, 등등. 또 노동쟁의는 행정관청에서 적법심사를 거쳐야 하며, 긴 시간의 냉각기간을 거쳐야 쟁의에 들어가 수 있었다. 그야말로 노동조합 금지법, 노동쟁의 금지법이었다. 이것은 노동악법의 전형이었다.
- 이 악법을 뚫고 87년 노동자대파업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전형적으로 악법을 어겨서 깨뜨린 투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투쟁과 이 투쟁으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행정관청은 법에 정한 바와 상관없이 설립신고가 들어오면 신고필증을 교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업은 법에 규정한 행정관청의 적법심사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 불법파업을 일일이 다 처벌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미 기정사실이 된 현실을 반영하여 87년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크게 볼 때 전두환 노동법에서 박정희 노동법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노동법의 독소적 요소도 다수 잔존하고 있었다. 제3자개입금지라든지 노동조합명칭 사용 금지라든지 주요방위사업체 쟁의행위 금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주적 민주노조운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복수노조금지 조항은 더욱 강화되었다.
- 이처럼 이 역시 노동악법이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88년 하반기부터 노동악법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으로 떨쳐나섰다. (‘노동악법 철폐가’ 참조.) 제3자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정치활동 금지, 교사⸳공무원의 단결 금지, 방위사업체 쟁의행위 금지 등에 관한 조항이 집중적으로 문제시됐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가열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 국회와 노태우 정권은 노동법을 개정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비준했으나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은 비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정당들의 국회는 여기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진출에 대해 보수대연합 즉 3당합당으로 응수했다. 김대중의 평민당은 여기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호남 민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로써 89년 노동법 개정은 무산됐다.
- 이 노동악법은 93년 취임한 김영삼 정권 하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김영삼 정권은 1993년 이인재를 노동부장관에 앉히고 억압적 노동정책 기조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자본의 반발이 극심해서 이인재는 1년 만에 물러나고 1994년 남재희가 장관이 되었다. 그는 전노협 청산과 노동법 개정을 거래하는 공작을 벌였다. 이 거래가 성립하여 1995년 11월 노동해방을 기치로 하는 전노협이 청산되고 사회개혁을 기치로 하는 민주노총이 창립되자 김영삼 정권은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설치하고 노동법 개정을 일정에 올렸다. 처음에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폐지할 듯 했으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12월 26일 새벽 3시)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기 위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것과 더불어 노동자의 단결과 파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여러 독소조항들이 추가되었다. 무노동무임금 법제화, 비공인파업 금지,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단체교섭 안 조합원 승인 투표 무효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본이 그동안 강력하게 요구해 온 것들이었다. 이것은 일각에서 잘못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로 인해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 천민자본주의의 주축인 독점재벌이 강력하게 요구해 온 것들이었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요구의 핵심은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근로자파견제였다. 이번 노동법 개정은 따라서 한편으로는 노동법의 개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법의 개악이었다. 이것이 96~97노개투 총파업의 결산서다.
- 이후에도 집단적 노사관계법은 거듭 개악되었다. 유보되었던 전임자임금지급 금지는 타임오프제로 실시되었다. 단위 사업장 복수노조 제도가 도입되면서 교섭창구단일화가 채택되었다. 다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가 어려워지자 법정 노동일의 길이는 1일 8시간 주 48시간에서 주 44시간으로, 그리고 주5일 40시간으로 점차 단축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도입과 함께 외주화, 근로자파견제와 탄력근로시간제가 확산되어 실노동시간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OECD 국가 중 두 번째 장시간노동을 하고 있다.
- 이상이 개략적으로 살펴 본 노동악법의 역사이다. 전노협이 청산되면서 노동악법 철폐투쟁도 실종되었다.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노동법 개정투쟁으로 축소되었다가 96~97노개투 총파업 이후에는 그마져 사라졌다. 이것이 치안경찰법적 성격의 노동악법이 지금까지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이유다. 천민자본주의의 요구가 그것의 온존을 요구했고, 개량주의적 노동운동이 그것의 온존을 방조했다. 그 결과 노동자의 단결과 파업의 자유는 국가와 독점자본이 노동자의 포섭을 위해 용인하는 공기업과 민간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어느 정도 허용되고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노동자에게는 장기간 실질적인 무권리 상태가 강요되어 왔다. 이로 인해 청년 세대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인간의 생명활동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지점, 재벌과 국민의 양극화와 함께, 노동계급 내부의 극심한 양극화에 이르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른 데는 독점재벌과 친재벌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에게 주된 책임이 있지만 그 못지않게 그들의 지배전략에 포섭되어 안주해온 노동운동에도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이 역사적 과오와 단절하고 바로잡는 데 일차적 의의가 있다.
2) 노동악법 철폐투쟁의 정세적 의의
- 노동악법 철폐투쟁이 가지는 의의의 또 하나는 윤석열 정권의 등장 및 그의 노동개악 정책과 관련이 있다. 윤석열 정권은 대선 운동 시기에서부터 민주노조운동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자본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이런 기조는 당선과 취임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에 우리는 윤석열 정권을 역대급 친자본/반노동 정권으로 규정하고 규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새해 들어 나타난 것처럼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전쟁선포로 나타날 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 지나고 보면 윤석열 정권이 예상을 뛰어넘어 노동운동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며 총공격하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현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것이 자신의 지지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안전운임제 연장과 확대를 요구하는 민주노총 화물연대의 파업을 깨뜨렸을 때 자신의 지지가 크게 반등했던 것이다. 이에 윤 정권은 교육개혁/연금개혁/노동개혁을 3대 개혁과제로 내놓고 추진하던 것을 순서를 바꾸어 노동개혁을 가장 앞에 내세우고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경제위기의 작용이다. 많은 경제분석가들이 2023년에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고 있다. 공황이 오지 않더라도 이미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생활 즉 민생은 파탄 직전이다. 이런 상태에다 경제공황이닥치면 기층 노동자⸳민중의 경제생활 즉 민생은 그야말로 파탄에 직면한다. 이것은 정권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민생파탄의 책임을 자본 측에 묻지 않고 노동 측으로 돌리는 것은 지배계급에게 통치전략상 아주 긴요하다. 이에 2023년이 되면서 윤 정권은 노동시장 양극화니, 이중 노동시장이니 하는 말을 부각시키면서 그 원인을 자본과 정권의 노동통제 전략과 정책이 아니라 노동운동 및 그것과 결탁해 있는 민주당의 친노조정책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규정하여 공세를 펴고 있다. 요컨대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에 전가해야 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그렇게 노동을 공격하는 것이 정권의 지지율 제고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 문제는 윤석열 정권의 이런 주장이 왜 많은 노동대중의 동의를 얻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의 노동시장 양극화는 오로지 총자본의 노동통제 정책만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노동의 자기변호론이다. 자본의 노동지배전략은 중소⸳영세⸳비정규직 등 절대다수 노동자들을 보호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초과착취함으로써 낮아지고 있는 이윤율의 저하를 상쇄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노동유연화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을 관철시키려면 노동계급의 상층부 즉 노동귀족의 동의 없이 관철할 수 없다. 그 경우 노동계급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었다. 이에 총자본은 노동계급 상층부에게는 고용⸳임금⸳복지 등에서 일정한 특혜를 제공하여 자본이 대다수 노동자를 초과착취하고 노동기본권에서 배제하는 것을 눈감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심지어 동일한 사업장 안에서조차 그런 분할통치전략을 구사했다. 그런데 재벌대기업이든 공기업이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분할통치에 동조했다. 그 결과 노동시장은 이중화/양극화되고 노동자의 다수인 기층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을 선망하면서 경원시하게 되었다.
- 이런 점에서 노동시장 양극화가 재벌 대기업과 거기에 종사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담합의 산물이라는 윤석열 정권의 규정이 일단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런 양극화의 주된 범인이 자본이기는 하지만 노동 또한 종범은 되는 것이다.
- 윤석열 정권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 양극화에 대하여 그 책임을 노동에게 물으면서 공격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고임금을 공격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고복지도 문제삼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임금⸳고복지⸳고용안정을 가능케 한 노동기본권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자본은 노동시장 양극화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은 노동귀족 층이 계급적 대의를 배반해 온 데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노동운동의 무력화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 이래, 광주민중항쟁을 딛고 수많은 노동열사를 낳으면서 투쟁해 온 이 땅 민주노동운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 이런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하여 노동운동 안에서는 그 흔한 노동운동 위기론도 없고, 위기를 극복할 전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작 현재의 양극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개악 반대’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한석호처럼 윤석열 정권의 상생임금위원회에 들어가서 고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얹어주자는,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다.
- 이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문제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대부분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이고 이들은 노동조합 할 권리에서도 배제돼 있다. 이것의 반대 측면이 노동귀족층의 존재이다. 노동귀족 층의 기득권이 제거되면 무권리와 저임금이 일반화되어 평준화 될 뿐이다. 그것이 아니라 생활임금과 무권리에서 배제돼 있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처지가 개선되면 양극화는 상향하는 방향에서 극복될 것이다.
- 일각에서는 유럽식 산별노조나 스웨덴 식의 연대임금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노동기본권이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된 다음에야 논할 수 있는 문제다. 절대다수 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이 박탈되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초점을 흐리는 이야기이다. 대책 없이 “사회주의가 답”이라고 되뇌는 것이나 다름없다. 산별교섭도 법제화해서 실현할 문제가 아니고 모든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로 단결했을 때 힘으로 관철해 나갈 문제이다.
- 이런 맥락에서 즉 극도로 심화되어 있는 노동 양극화를 타파하는 지극히 노동자적이고 원칙적인 방도로서, 그리고 윤석열 정권의 노동운동 무력화 공세에 능동적 공세적으로 받아치는 전략으로서 노동운동은 개별적 노사관계 개악(호봉제 폐지 및 직무⸳성과급 도입) 반대에 머물지 않고 주동을 틀어쥐고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노동악법 철폐와 전면재개정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떨쳐나서야 한다. 여기에서도 악법철폐 없는 전면 재개정은 이 사안이 갖는 계급 적대성을 희석시키는 슬로건으로서 채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과 그들의 수족들이 노동악법 철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1년 넘는 굴뚝 투쟁에서 처절하게 증명되었다.
2. 노동악법 철폐투쟁을 추진할 방도
1) 노동조합이 이 투쟁을 받아 안도록 추동
- 노동악법 철폐투쟁의 일차적 담당자는 노동조합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 요구 자체가 노동조합의 경제적 정치투쟁의,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의 요구이다. 이 요구는 본격적인 계급적 정치투쟁의 요구가 아니고 그러한 투쟁을 감당할 의사와 능력이 부족한 노동조합이라도 이 정도의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은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투쟁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일차적으로 현재 노동조합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1988년 이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가 각각 그 역할을 나누어 수행한 바 있다. 그러나 후자 같은 노동운동단체는 지금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부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주노조운동이 혼자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 그러나 지금의 민주노총에는 그것을 추진하려는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산별이나 어느 정파에서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또한 문제다. 그러므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운동체가 노동악법 철폐투쟁을 자신의 임무를 받아 안고 투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노조운동체 외부에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추동하는 부분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추동작용 없이는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결코 힘 있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사실,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어왔고 이끌고 있는 전⸳현직 지도부들 대부분은 현재의 집단적 노사관계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노동운동을 통제⸳억압하는 노동악법이라는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 철폐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자유가 허용되었고, 교사⸳공무원의 단결권이 허용되었으며, 이렇게 독소조항들이 개정되었으므로 현 노동법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노동악법이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단적 노사관계에 관한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노란 봉투법’으로 원청 사용자성 인정, 특수고용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및 과도한 손해배상 제한을 요구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 그러면 누가 노동조합의 노동악법 철폐투쟁을 추동할 것인가? 어떤 정당? 어떤 단체? 어떤 개인?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한다.
- 어떤 통로로 추동할 것인가? 상층부에 대한 정치사업으로 추동하는 것이 하나의 통로라면(지역, 산별 및 총연합단체 등 각급 수준의 지도부) 아래에서부터 추동하는 것이 다른 하나의 통로가 될 것이다. 예컨대 2006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당시 후보를 내서 조직혁신 방도로서 임원 및 대의원 직선제를 요구했던 것처럼 위원장 선거에서 후보공약으로 제기하거나 또는 후보 없이 대의원 대회에서 노동악법철폐투쟁을 사업계획에 포함하도록 제안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 어떤 것을 매개수단으로 추동할 것인가? 예) 온라인? 조합원 토론방 활용. 오프라인? 각종 회의나 집회 및 대회에서 발언 및 선전물 배포. 이 지점에서 창의적 사고와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2) 헬조선 변혁/급진민주혁명 투쟁의 한 축으로 추진
- 이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헬조선 변혁/급진민주혁명 투쟁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이다. 노동악법은 국가보안법과 함께 헬조선의 대표적인 파쇼악법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강령적 요구의 하나이다. (강령 및 주요 사업과제 참조)
- 그러나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노동양극화 타파만 하더라도 노동악법 철폐와 함께 독점재벌의 경제지배가 타파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노동악법 그 자체로 노동자의 삶을 옥죄고 있으므로 철폐돼야 하지만 노동양극화 타파를 위해서는 독점재벌 해체를 함께 요구함이 없이 노동악법 철폐만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 하지만 현 노동조합운동은 독점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이 재벌해체 요구까지 받아 안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운동에게는 우선 노동악법 철폐를 요구하도록 추동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 안에서도 기회 있는 대로 독점재벌 해체 요구를 계속 선동하고 받아 안도록 추동해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 양극화 타파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노동악법 철폐와 독점재벌 해체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노동계급 양극화 타파에 성공할 수 없다. 헬조선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 전체가 변혁되지 않는 한 그것들 또한 철폐되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수양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중권력을 전취하는 정치혁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헬조선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 그런 헬조선 변혁 과정에서만 노동악법 철폐도 독점재벌 해체도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악법 철폐를 통한 노동양극화 타파 문제도 헬조선 변혁추진위원회의 급진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로서 접근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헬조선 변혁 추진위원회 회원들은 자신의 강령을 충분히 숙지하고 기회 있는 대로 이 강령적 요구를 광범한 노동대중에게 적극 선전선동을 해야 할 것이다.
- 다만 그 동안은 강령적 요구 가운데 독점재벌 해체라든가, 보수양당독재 타도라든가, 주택재분배와 전면적 사회보장 실시라든가 하는 부분을 집중 투쟁과제로 삼아 투쟁해 왔다. 이번에는 정세적인 이유에서 노동악법 철폐가 그 집중투쟁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악법 철폐 거부하는 보수양당독재 타도하자” “보수양당 독재 타도하고 민중권력 쟁취하자”는 구호가 필요할 것이다.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이런 계급정치적 투쟁은 노동조합이 받아 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헬조선변혁추진위원회와 같은 혁명적 정치운동이 선도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이다.
- 어떻게 이 노동악법 철폐를 노동자⸳민중 일반에게 선전 선동할 것인가? 이와 관련 민족운동 조류가 벌이고 있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은 온라인에서 시작하여 최근 오프라인으로 활동형태를 발전시키고 있다.
- 이런 적극적 활동을 위해서는 1) 어째서 현행 노동법이 노동악법인지(집단적 노사관계에서 장기지속 되어 온 치안경찰법적 법체계이므로), 2) 노동악법은 왜 시급히 철폐돼야 하는지(독점재벌과 함께 절대다수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와 노동 양극화의 주요 원인이므로), 3)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지(헬조선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를 끝장내는 급진민주혁명 투쟁의 중요한 일부) 등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일회적인 학습과 토론이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토론이! 그리고 지속적인 실천이!
1) 이 두 개의 투쟁에서 루스벨트 정부가 노조와 사용자 사이에 중재에 나서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승리했다.
2) 태프트-하틀리법은 1947년 전국노동관계법(NLRA)의 다른 명칭이다. 이 법은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트루만 대통령의 거부권행사에도 불구하고 입법하였다. 이 법은 1935년에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조가 행하는 몇 가지 관행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해서 금지했다. 이 법에서 금지한 노조관행으로는 관할권 파업, 비공인 파업(와일드 캣), 연대 파업 및 정치 파업, 세컨더리 보이콧, 클로즈드 숍 등이 있다.
3) 그러나 1953년 노동법에서는 교사의 노조 금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59년 말부터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었고, 4월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교원노조가 결성됐다. 과도정부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대구고등법원은 합법이라고 판정했다. 장면 정권은 교원노조는 인정한다는 타협적 태도를 보였으나 설립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반면에 교원노조를 불법화하는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다가 교사들의 투쟁과 여론의 압박에 밀려 그마저 포기했다. 그러나 끝내 설립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한국노동운동사』 김낙중